시대의 거울, 재즈: 각 시대 양식에 담긴 이야기
재즈는 항상 소수의 관심사
였다. 언제나 그러했다.
그러한 사정은 지금도 다를 바 없다. 앞으로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건 비슷하다.
그 재즈가 범사회적으로 대인기를 누렸던 때가 딱 한 번 있었다. 그때가 바로 1930년대 스윙 재즈 시대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흑인 재즈맨 일부에서만 보였던 창조적 재즈에, 일반인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냉담했다. 그것은 소수
가 아니라, 아예 극소수의 관심사
였다. 사교 • 오락 음악만이 그들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재즈 음악에 신경을 기울이는 것이 이제는 결국 우리 모두의 선(善)을 위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의 대중 음악 전부가 바로 재즈를 먹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TV 연속극이나 라디오의 인기 가요, 생활하면서 곳곳에서 스치는 온갖 음악, 록, 펑크, 그리고 최근의 힙 합 hip hop, 나아가 우리를 에워싸는 대중음악들 ……. 이 모두가 바로 재즈로부터 연원한다.
이 말이 과장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그 근거는 무엇일까? 서구 음악에서 클래식과 대중 음악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구분은 비트beat
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다. 그 비트
가 다름 아닌 재즈에서 연원했다. 그런데 재즈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우리의 실제 생활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그것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중요한 환경이기도 한 소리의 질quality of sound
을 향상시켜 준다. 결국, 이것은 인간 의식 수준 전반에 걸친 향상으로 직결된다. 생각해 보자. 현재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청각적 환경에 에워싸여 있는지를. 방송의 호들갑과 온갖 기계 소음 따위에 파묻혀, 빈사 지경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이 바로 음악적
소리이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소리가 우리 삶의 질에 곧바로 영향을 미침에도 불구하고, 사정은 이렇듯 열악하다.
재즈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다
는 일은 일개 특정 장르의 음악을 즐긴다는 데에 국한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재즈 특유의 인간미, 그리고 강렬함을 우리의 삶 속으로 옮겨 심는 일이다.
우리가 앞으로 쭉 개괄해 보고자 하는 각 재즈 스타일과 그 시대의 환경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성립한다. 이 점은 곧 개괄적으로 논급 할 것이다.
예술의 한 장르로서의 재즈에서 특히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 양식적 발전 stylistic development
이다. 재즈사에는 연속성, 논리, 통일성, 내적 필연
등의 예술사적 가치들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예술사에서 말하는 참된 예술 true art
의 발전 논리가 재즈사에서는 온존되어 있다.
물론, 어느 특정 시기의 재즈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것을 따로 떼내어 그것만이 각별히 유의미하다
거나 아니면 일탈
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재즈라는 거대한 예술 장르에 내재된 전체성을 파괴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또 눈에 쉽게 띄는 일시적 유행 fashion
쪽에 더 관심이 갈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가까운 예로,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재즈 붐은 일종의 유행
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양식 style
을 논할 수는 없다.
시대별 재즈 양식들은 각각 예술적으로 완결된 하나의 구조이며, 또한 자기 시대의 반영물인 것이다. 이 점은 클래식 음악사에서의 고전주의, 바로크, 낭만주의, 인상주의 등이 유럽의 특정 시기와 정확하게 일대일 대응하는 것과 꼭 같은 이치이다.
도대체 어느 예술이 그토록 극적으로 뚜렷이 분화•발전하였으며, 동시에 그토록 밀접하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가? 그것도 불과 7,80년이라는 짧은 세월 안에.
더 중요한 사실이 또 있다. 도도한 대하처럼 끊이지 않는 연속성
이 재즈사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여러 재즈 양식을 재즈 비평가나 뮤지션 자신들이 스스로 논할 때, 흐름 stream
이란 단어를 즐겨 써왔으며, 또 쓰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개념이 재즈의 역사에서 맨 처음 선보인 것은 스윙 재즈 때 등장한 주류 main stream
라는 용어이다. 이후 그 흐름
이란 말은 당대 재즈의 추이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즐겨 쓰이게 된다. 그 대표적 예가 제3의 흐름 third stream
이란 유파이다.
때로 그 흐름
은 폭포나 소용돌이, 아니면 급류를 통과하는 듯 끊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하나의 줄기, 하나의 연속적 흐름이다. 우리가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그 어느 양식도 여타 양식을 대체 replace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각 시대를 풍미한 조류나 유행은 자기 앞 시대에 나왔던 여러 흐름들 모두가 집적된 것이다.
각 시대 최상급의 재즈 뮤지션들은 자신의 연주 스타일과 자기가 사는 시대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엄존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이 점을 시대별로 좀 더 자세히 개관해 보자.
딕실랜드 재즈
는 참으로 즐겁고, 나아가서 그지없이 천진무구하다. 거기에는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의 평화스러운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 뒤, 울부짖는 1920년대 Roaring Twenties의 불안 • 초조가 재즈로 구현된 것이 시카고 스타일
이다.
스윙 재즈
는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무렵의 미국 사회를 휩쓴 대량 표준화 massive standardization
에 대한 신념의 음악적 등가물이다. 그와 관련하여 평론가 마셜 스턴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스윙 재즈란 ‘거대함’을 숭배하던 당시 미국인들의 정서가 음악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 직후에 나온 비밥
에는 1940년대를 지배하던 불안 • 초조의 분위기가 잘 반영되어 있다.
바로 다음 세대가 맞닥뜨린 공포는 핵전쟁이라는 듣도 보도 못하던 괴물이었다. 수소 폭탄이 세상을 언제라도 박살 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음악이 바로 그, 다음 시대를 휩쓴 쿨 재즈
이다. 쿨 재즈 특유의 지성적 분위기의 저류에는 저 같은 체념의 정서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성난 항의의 재즈인 하드 밥
이 나타났다. 하드 밥은 두 가지로 나뉜다. 펑크
와 솔 soul
이란 유행에 흡수되어, 체제 속으로 통합되는 것이 그 첫째이다. 그 두번째가 이에 대한 음악적 항의 또는 자각의 산물로서, 비타협 • 급진의 음악 프리 재즈
이다. 그것은 I960년대 전 미국을 휩쓴 인권 운동과 격렬한 학생 시위, 이 두 가지 사건과 궤를 같이한 것이다.
이어, 1970년대에는 체제 통합의 국면이 새롭게 재개된다. 그 시기를 대표하는 음악인 재즈-록
또는 퓨전 재즈
는 기술과 진보에 대한 당대의 신념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현재 상황에 대한 신념이다.
그 반면, 1980년대로 접어들면 재즈는 회의한다. 즉, 한번도 제대로 의심 받아 본 적 없던 그 진보와 풍요에의 믿음
이 지금 인간들을 어디로 데려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선구적 재즈맨들은 전례 없이 격렬하고 진지하게 생각과 실험을 되풀이하고 있다.
바로 위의 이야기는 지극히 일반화하고 단순화한 논의이다. 그러나 재즈사를 개괄하는 데에 대단히 효율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그 같은 10년 단위
설은 그러므로 재즈사 서술의 대원칙으로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지나간 스타일을 되살려 보려는 노력에 대해 일급의 재즈 뮤지션들은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재즈는 그러한 역사주의
또는 회고주의
와는 거리가 먼 음악이다. 재즈 음악은 살아 있는 생명체와도 같이 생장하고 소멸한다. 변화를 멈추지 않는다.
다음의 일화가 그 같은 변화의 논리
를 극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1950년대에 카운트 베이시의 음악이 세계적 명성을 얻자, 한때 베이시 악단의 일급 독주자였던 레스터 영에게 옛 동료들과 다시 모여 1930년대 베이시 스타일을 재현해서 취입해 보지 않겠느냐
는 제의가 들어온 적이 있다. 그러자,
나는 그렇게는 못합니다 라고 영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나는 이제 그런 방식으로는 더 이상 연주하지 않아요. 난 그때와는 다르게 연주합니다. 바로, 내 삶이 달라졌기 때문이죠. 이것이 요즘 식입니다. 그건 옛날 거고요. 우리는 변화합니다. 아니, 거기서 그렇게 가만히 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