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환을 말한다 — 박재천의 기억 (1)
나의 음악 여정은 1990년대 후반기를 기점으로 해 강태환 이전, 강태환 이후로 나뉜다.
안타깝게도 앨범을 못 낸 강태환 트리오는 선생에게 어떤 한계를 자각케 했던 것 같다. 88올림픽 이후 마침 일본 쪽에서 그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기 시작했고, 그 역시 두 번째 파트너가 필요했다.
구스타보 아길라, 리차드 마우러 등 미국 쪽 뮤지션들이 주축이 된 퓨전 월드 뮤직 그룹의 타악 프로젝트였다. 1993년 음대 출신의 뜻 맞는 사람들과 만들어 활동했던 타악 그룹 ‘몰이모리’의 뒤를 잇는 작업이었다. 25년째 한국 고유의 타악기를 중심으로 해 오고 있던 작업이 과연 얼마만큼 보편적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풀고 싶은 욕심이 컸다.

©김지곤
당시 게스트로 초청된 뮤지션이 강태환 선생이었다. 타악 주자 3명이라는 단순한 편성의 한계를 극복하게 할 사람으로 그들은 미국의 색소폰 주자 웨인 쇼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쁜 데다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는지라 나는 미국 측에 “한국에도 대단한 사람이 있다. 쇼터보다 위대하다”고 말했다.
사흘간 대학로 한 지하 극장에서 이뤄졌던 ‘ Zen Din’ 무대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선(禪)적 명상의 음악에서 노이즈 뮤직까지 다 포괄한다는 뜻으로 지었다. 나로서는 우리 전통 악기와 장단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추출해 나만의 월드 퓨전에 도달한다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의 일부였다.
대학로 라이브극장에서의 공연에서 자신감을 얻은 우리 셋은 1달 뒤 미국 투어를 떠났다. 내가 아시아 쪽의, 구스타보가 미국 쪽의 프로모터로 나선다는 계획까지 구체적으로 잡아 뒀다. 그러던 중 미국에 있던 나에게 강 선생이 전화를 걸어 왔다. “타악 말고 자유 즉흥을 경험해 보라”는 제안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계시였던가 싶다.
나와 상의도 않고 공연까지 잡아뒀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선생에게 강하게 끌린 터라 나는 ‘강태환 – 박재천 프리 뮤직 듀오’ 라 이름 붙여진 무대를 대구와 영천에서 만들어 갔다. 사전 약속이라곤 전혀 없었다. ‘듀오 20분 – 강태환 20분 – 나 20분 –마지막 듀오 20분’이라는 형식만 협의 되었을 뿐이다.
2001년 이후 형태는 좀 달라졌다. 사전에 아무 약속도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가 일방적으로 정해 번갈아 나오는 형태가 아니라, 서로의 어떤 요구라도 따르는 무대였다. 심지어 바닥에 앉아 있다 그냥 끝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다. 당연히 즉흥은 할 때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뻔뻔스러운 행위였다. 예를 들면, 연주에 취해 있다 보면 무대 밖으로 나가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 때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다. 무례하다기보다 ‘깡’이 셌다고 하고 싶다. 당연히 객석의 반응은 썰렁했다. 확실한 적자 무대였다. 그러나 다행히 공연장 측으로는 이런 사람의 음악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었다. 강 선생의 반응이란 “심적 부담은 갖지 말라. 아, 재미있는 일 아닌가” 정도였다. 그 사건은 강태환을 새롭게 보는 출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