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환을 말한다 — 이정식에 의한 강태환

©김지곤
이하는 강태환을 주제로 이정식 씨와 만나 오래전 나눴던 대담이다. 적잖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울림은 오히려 더하다. 수정 없는 전재(全載)의 이유다.
색소폰 주자 이정식과 나는 강태환의 앨범 ‘도깨비’(1991년작)를 함께 들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호적이나 장고 같은 전통 악기가 샤머니즘의 아우라를 두텁게 펼치는 가운데 그의 색소폰은 무언가를 갈구하거나 무엇에 대해 항의하고 있었다. 견강부회하자면 월드 뮤직 정도로 구획 지을 수 있을 그 소리는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마니아들의 중평이 단지 호사가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듯했다.
1961년생의 그(이정식)는 수원여대 실용음악과 교수로서 옛적에 비하면 현격히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거기 오기까지, 그의 쉽지 않은 삶의 여정에서 빛나던 순간에는 언제나 재즈가 있었다. 모처럼의 만남은 긴 대담을 전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씨를 만나기 전 저자는 우선 강태환, 박재천 씨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먼저 전달했다. 책의 편제와는 정반대되는 행로를 택했던 것은 일상 속에 파묻혀 있던 순수의 시간들이 효율적으로 복원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예상대로 그는 흥미롭게 읽고 왔던 듯싶다.
문제는 소통의 가능성이다. 재즈맨으로서의 성취와 대중적 인지도를 겸비한 그는 분명 그 가능성의 폭과 깊이를 더했다. 강 씨와 대중 사이에 흐르는 강을 도하해 내는 데 필요한 탈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앨범 ‘도깨비’는 여전히, 계속 발전 중인 선생의 기량을 모두 담고 있을 뿐더러, 내면과 사상적 측면까지 포괄하는 작품이다. 여타 앙상블 편성의 음반들과 비교해 봤을 때, 그의 진정한 색채는 역시 솔로 연주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그 같은 점은 나도 마찬가지다. 앙상블은 결국 대화의 양식이므로.
그 앨범은 단선율 악기를 통해 재즈적 즉흥의 정수를 담고 있다. 앨범 전체를 솔로로 만드는 경우는 피아노라면 많지만, 단선율 악기로 그 같은 일에 도전한다는 것은 최고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임을 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홀로 감당하는 경우는 대단한 예외다.
강 선생을 처음 만났던 것은 오래전, 낙원상가 뒤편에서 선생이 나름의 프리 재즈를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이태원의 클럽 올댓재즈에 베이시스트 장응규, 피아니스트 이영경과 함께 출연하며 재즈에 대한 열정으로 후끈 달아있었다. 풍문으로만 듣던 선생을 직접 본다는 기대와 함께.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구나!’ 그의 음악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의 느낌은 오직 그랬다. 충격이었다. 한마디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음악의 이론은 전혀 통하지 않는 음악이라는 생각이었다. 오로지 자기가 하고픈 대로만 하는구나, 프리 재즈란 알고 보니 막 하는 재즈로구나, 하는 ‘오해’가 두서없이 튀어 올랐다. 지금은 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으로 ‘이해’하지만.
나는 이후 몇 차례 거길 더 갔다. 당시 주된 관심은 그가 마음껏 구사하는 초절 기교에 가있었다. 순환 호흡이란 게 있다는 말만 듣고 막연히 상상하고 있을 때였으니까, 트럼페터 최선배 씨가 빨대를 불어가며 해주는 이야기에 마음이 쏙 빼앗겼으니까. 그 현란한 테크닉을 모방해 실제 연주에 쓰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더블 톤, 텅잉, 겹음 등 여타 테크닉은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든 해낼 수 있다. 결국 방법을 몰라서 못 하는 기교인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것들을 자기화하여, 내면의 생각과 일치시켜 표출하느냐의 여부다. 순환 호흡이라는 테크닉을 일단 마스터하면 하루 종일이라도 소리를 낼 수 있지만, 문제는 이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다. 관객의 반응까지 계산하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런 게 없으면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그와 음악적으로 부딪친 것은 종로의 사랑방 같은 무대다. 50명도 채 못 들어가는 그 무대에서 우리는 스쳐 지나듯 즉흥을 펼쳤다. 물론 그전에도 KJC(한국재즈클럽) 사무실 같은 곳에서 하는 아주 작은 콘서트를 통해 그 연주를 몇 번인가 보았다. 김대환 씨 등과 열던 소규모 공연이었다.
시작은 누가 하든 끝날 때만 맞추는 무대였다. 약속되는 것은 멜로디가 아니라 리듬이었다. 선율은 자기 마음대로 하다 끝을 맞추는 식이다. 누구든 그 리듬으로 연주를 시작하면 ‘아, 이제 끝냅시다’ 하는 신호를 받은 걸로 알고 마무리 지었다.
말하자면 대화의 양식이었다.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 누군가가 주제어를 제시한다. 자기 이야기를 더하고 싶은 사람이 솔로로 치고 나가면 타인들이 배려해준다. 이런 화학적 반응 과정이 이어지므로 시간을 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방식도 있었다. 모두 시계를 앞에 두고 봐 가며 하다, 약속한 시점에 끝내기도 했다. 경험적으로 봤을 때, 이 방식이 더 미학적이었다.
서로 불편할 수도 있었을 자리였다고 생각한다. 당시부터 선생은 솔로로 연주할 때 가장 빛나는 분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그렇다면 나는 왜 프리의 길을 택하지 않았을까? 답은 단순명쾌하다. 프리는 생계의 방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단언한다. 돈이 안 되는데 계속한다는 것은 그 당사자에게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힘들게 살아가며 그 길을 택하는 사람에게도,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는 사람에게도, 그 점은 진실일 것이라 믿는다.
나는 도저히 그럴 만한 상황이 못 됐다. 돈도 안 되는데, 외국서 보름이고 한 달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재즈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로서는 가정을 지켜야 했다. 30대 이후 재즈의 본질적 의미를 탐구해 가기보다 일본, 미국 재즈 타악 주자 등지의 해외 연주 기회를 중시하게 된 것은, 가장으로서의 의무가 가장 큰 이유다. 저 같은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고 자신의 예술 세계를 지켜가는 박재천—미연 공사판의 일용직을 해 가면서까지 예술을 지켜가는—불굴의 정신이 부럽다.
이후 사물놀이의 김덕수 씨도 참여해 신촌에서 벌어졌던 판에 나는 대여섯 번 참여했다. 선생과의 마지막 무대는 제천-미연 트리오와 종로의 사랑방 같은 무대에서 완전 즉흥으로 가졌던 자리였다. 재즈 평론가 남무성의 제의였다. “‘옛날 종로의 카페식 극장에서 하던 그 퍼포먼스의 원형을 그대로 재현하자’는 것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프리 재즈다. 그 미학적 결정체가 제기하는 문제는 진짜 재즈가 설 곳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보다 심각하며 본질적이다. 프리 뮤직을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내몰리듯 지하로 은둔한다. 진정한 문제는 음악의 다양성이 훼손된다는 점이다. 나의 선택? 프리 재즈를 하자는 제의만 온다면 장소와 형식의 구애를 받지 않고 OK다.
관건은 프리 뮤직에서 요구하는 철학적 구성이 최고치로 실현될 수 있게 음악적 역량을 끌어올리는 데 있다. 철학적이란 무슨 말이냐? 콜트레인의 속사포 같은 테크닉 (sheets of sound) 같은 것만 탐닉할 것인가? 언어를 초월한 영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마이클 브레커처럼 앙상블의 조화를 구현할 것인가? 문제는 음학(音學)적인, 즉 음 자체에 대한 탐색과 접근에 있다. 즉 프리 뮤직도 앙상블 내에서 악기 간의 리듬 조화처럼 전체적인 아름다움의 경지를 추구할 때, 미학적 성취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선생에게는 영적 접근이 우세하다. 두세 음을 동시에 내는 것 같은 초절 기교의 내용적인 면에 대한 분석에, 그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음학(그는 음악이 아니라 음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접근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적인 사람은 자신의 소리를 다 쏟아내는 것을 넘어서서, 물론 타인의 입장에 서서 분석한다. 대체로 동양 음악인들은 영적인 면이 강한 법이다.
지금 모든 일들을 돌이켜 보면, 선생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특히 그가 양식적 탐색의 결과로 도달한 ‘프리 뮤직’은 그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미증유의 장르다. 요즘 관점으로 보자면 굉장히 무모한 동시에 굉장한 도전이다. 바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 덕에 음악은 정체하지 않는 것이다!
오래전 뉴욕의 빌리지뱅가드 클럽에서 연주할 때, 프리 재즈의 거장 파라오 샌더스와 대기실에서 만난 적이 있다. 얼핏 안면이 있던 내게 먼저 인사하더니 선생 이야기를 해왔다. 그처럼 외국의 프리 재즈 뮤지션들은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일본 뮤지션들에게 그는 친숙한 이름이다.
자, 음의 재현과 학문적 탐구라는 측면에서 프리 뮤직에 접근해 보자.
먼저 쇤베르크, 바르톡 등 12음 기법파의 접근 방식, 즉 기보에 의한 재현이 있다. 다음으로, 녹음 등의 수단으로 음을 채취해 그를 천착하는 방식이 있다. 그렇다면 선생의 프리 뮤직이 앞으로 어떤 양태로 존재할지 참으로 궁금하다. 그의 음악은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가장 합당한 방식일까?
우리 시대 음악은 갈수록 소비자, 즉 대중의 관점에 더욱 비중을 둔다. 특히 대중음악 작곡의 경우는 더하다. 재즈 역시.
안무나 청중의 반응 등 음악 외적 문제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는 추세다. 이 같은 현상은 심화되어가는 추세에서 대중과의 접촉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 자신의 작업에 몰입하는 자들이 가장 ‘정확한’ 길을 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언젠가는 진정한 음악이 대우받는 때가 오지 않을까. 이런 말을 하고 보니 내가 더 초라해지는 것도 같고…
진짜 용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맨 앞에서 돌격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쏟아지는 총알을 피하려 자꾸만 숨어드는 것 같은 형국 아닌가. 결국 나는 프리의 길과는 멀어졌다.
젊은 재즈 뮤지션들이 내 연주를 듣고 재즈의 길로 들어섰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 그럴 때면 솔직히 부끄럽다. 예전에 나는 재즈를 위해 태어났다, 재즈를 위해 헌신·고뇌한다고 자신해왔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젊은 재즈 학도를 위해 변변한 힘도 못 쓴다는 생각이다.
그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동시에 모처럼 나를 돌아다볼 시간이 만들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프리 뮤지션은—프리 재즈인지 프리 뮤직의 구분은 무의미하다—자신의 음악을 위해 정진한다. 그러나 나는 자꾸 뒤로 숨고…, 부끄럽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뾰족한 방법이 없다. 저것은 말하자면 나 자신만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편한 길만 가려는 습성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를 떠올리면 해야 할 것을 회피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도드라지는 것 같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G20에 들었다고, 세계 4대 스포츠 대회를 개최하게 됐다고 떠들썩하지만 강 선생처럼 자기 길을 고집해 온 예인들에 대한 홀대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위선이다. 길이와 다양성에서 일본과 우리는 아직 현격히 차이 난다. 겉멋만 존재한다. 재즈뿐만 아니다. 그 와중에 강 선생은 제대로 가고 있다. 결국 그들이 성공하는 날이 올 것이다.
사실 프리 재즈의 세계적인 흐름으로 보자면 그는 그리 앞선 게 아니다. 이 말은 미학적 성취도와는 별개의 문제다. 그에게는 그만의 것이 있다. 그것을 한국적이라 해도 좋고 동양적이라 해도 좋지만, 분명 서구 재즈는 모방할 수 없는 고유의 경지가 있다.
사실 프리 재즈의 세계적인 흐름으로 보자면 선생은 그리 앞선 게 아니다. 그렇다고 미학적으로 성취도가 낮다거나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참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에게는 그만의 것이 있다는 점이다. 아무도 넘보기 힘든 절대적 독창성, 그것을 두고 한국적이라 해도 좋고 동양적이라 해도 좋다. 확실한 사실은 서구 재즈의 접근법으로는 모방할 수 없는 고유의 경지라는 점이다.
그럼, 같은 동양권인 일본은 왜 ‘동양적 재즈’가 없나? 그들의 천재성은 모방하는 데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적어도 그들의 재즈에는 일본적인 것이란 없다. 그러나 강 선생의 연주를 눈 감고 들어보라.
완벽하게 한국적인 게 느껴진다. 우리 산천을,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다니는 기분이 단박에 든다. 한국적인 가치를 굳이 의도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의 삶 모든 것이 녹아든 것이다. 그의 음악은 서양인은 물론 일본인도, 흉내조차 못 낸다. 음악이란 살아온 환경의 자연스러운 총합체이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에는 이 변화무쌍한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내 음악은 어떤가? 나는 삶에서 이렇다 할 큰 굴곡은 못 느꼈지만 내가, 우리가 겪은 많은 일을 내 음악 속에 고스란히 녹이려 애써왔다. 한국인들이 평균적으로 겪는 수고로움, 사회에서의 고생, 시대적 고난…
개인적으로 봤을 때, 한국에서 재즈를 해 나간다는 것은 전쟁이다. 그 싸움터에서 꿋꿋이 동행해온 박재천 부부는 지켜져야 할 소중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