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환과 어느 드러머의 영원한 찰나

드러머 안기승의 강태환과의 찰나적 만남은 그의 음악 여정에 깊이 각인돼 있다.

In a nutshell

    어느 드러머의 영원한 찰나

어느 드러머의 영원한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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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머 안기승은 강태환과 딱 한번 만나 연주했다. 그러나 자신감과 의욕이 넘치던 때, 이뤄졌던 찰나적 만남은 그의 음악 여정에 깊이 각인돼 있다.

그는 대중 음악 드러머로는 희귀한 유학파다. 프랑스에서 드럼을 공부하고 귀국, 실력파로 이름이 오르내리던 1995년 초였다. 그의 연습실로 강씨가 느닷없이 쳐들어오듯 찾아왔다. 조그마한 장바구니에는 알토 색소폰이 담겨져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무슨 곡을 할지 말도 않고는 다짜고짜 ‘같이 한번 맞춰 보자’며 방석을 펼치고 가부좌를 틀더니 알토 색소폰을 불었다. “프리 재즈는 보통 한 곡에 10분 정도 잡아야 한다. 내가 악기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어야 한다”더니 ‘연주’는 시작됐다. 그 소리를 들으며 즉각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반응하는 게 주어진 일이었다. 바람이 불면 자연스럽게 물체가 소리 내듯 하라는 주문이 있었다. 안기승에게는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며칠 지나서 편지가 왔다. 연주자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마음이 읽혔다. “첫 프리 재즈일 텐데 만족스러운 건 아니지만 당신의 패턴이 만들어질 것 같다, 계속 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다”는 요지를 아직도 그는 잊지 않고 있다.

당시 그는 그 속뜻을 몰랐지만 갈수록 생생해지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 뜻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강태환의 청파동 자택 지하실을 찾아 갔지만 유학 비용을 마련하느라 돈벌이에 나서야 했던 처지였던 지라 더 이상 깊은 만남을 훗날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A급 대중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부대낀 드러머다. ‘사랑과 평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밴드 멤버였다면 최상급의 실력파다. KBS경음악단, MBC관현악단 등 이후의 경력도 그 같은 사실과 운을 맞춘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 원체험을 규정하는 것은 재즈다. 특히 까마득 잊고 있었다 싶은 프리 재즈의 기억은 흐를수록 뚜렷해짐을 어쩔 수 없다. 그의 삶에서 재즈는 어떻게 각인되어 있을까?

미 8군에서 재즈 드러머로 활동한 부친(안명훈)의 영향으로 놀랍게도 9세부터 미 8군 쇼 무대에 섰다. 물론 당시는 트위스트 같은 유행 음악이었다. 김대환, 허영욱, 조상국 등 세 드러머가 재즈 드럼의 판도를 가름하고 있던 당시, 허영욱을 사사한 그는 해군 군악대에서 미국의 빅밴드 악보 그대로 공부했다. 정통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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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접어든 드럼의 길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자식이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92년 그는 파리의 생브리스 콩세르바트와에 입학했다. 늦깍이 유학은 학위증을 받아야 인정해 주는 한국 풍토가 한몫했던 것은 현실적으로 사실이었다. 그러나 보다 내면적으로는 “평생 노래 반주만 해주다 끝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더 컸다. 거기에 타악 공부라면 팀파니나 마림바 등 클래식 악기만 쳐 주던 분위기도 한몫했다. 이를테면 보다 높은 음악에 대한 갈망이었다. 실제로 재즈 클럽 공연이나 1세대 재즈 뮤지션들과의 무대는 그 갈망이 유효함을 말한다.

강태환과는 단 한번 협연 해 봤을 뿐인 그의 예술적ㆍ미학적 자존감은 실은 매우 강하다. “그런 분이 한국에 한 분이라도 계신다는 것, 문화 선진국에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자부심의 근거다. 진정한 예술적ㆍ영적인 가치가 천대 받고, 실력도 없는 사람이 돈 벌고 대접 받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한국에는 기준이 없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만일 다시 할 기회 온다면? “자신 있게 할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영적인 세계에 빠지고픈 마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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