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강태환을 기억하다

©김지곤
무대와 방송 또한 인터넷까지, 다양한 온-오프라인 경로를 통해 재즈의 전도사를 자임하고 있는 기타리스트 김영수 씨. 강태환에 대한 독특한 기억을 나눴다.
“쉬지 않고 5시간을 연습한다는 데서 의당 나올 법한 외골수적 분위기는 전혀 없었지요.”
독일 쾰른 음대, 스위스 베른 재즈 음대, 암스테르담 음대 등 유럽서의 재즈 공부 시기를 마친 뒤 미국에서 현장의 재즈와 부대끼며 재즈의 혼(soul)을 체득한 김씨가 동아방송예술대 영상음악과 교수직으로 있을 때였다.
아이폰 어플 시장에 ‘김영수 교수의 재즈화성학 강의’를 시작, 향후 국내에서의 본격 활동을 가늠할 요량하고 체류 중이었다. 피츠버그대 재즈학 박사 과정에 있기도 했던 그가 강태환과 가졌던 짧은 만남은 선(禪的)인 커뮤니케이션이었을지도 모른다.
1990년대말 문화일보홀에서 가졌던 실험적인 재즈 콘서트에서 두 사람은 6분 동안 즉흥 연주를 펼쳤다.
“먼저 할 테니 알아서 따라 오라는 말씀을 하시더니 리허설도 없이 곧바로 실제 연주에 들어갔죠. 당시 제 젊은 혈기를 감안하셨던가 봐요, 선생님께서 여러 좋은 말씀을 해주셨어요, 호흡이 긴 멜로디를 하라고. 또 음악을 내 안에서 발견하라고도. 당신은 쉬지 않고 5시간도 연습한다면서.”
미국으로 유학 가기 직전이었던 2000년, 그는 강은일(가야금)ㆍ허윤정(가야금) 등 젊은 국악 주자 등이 강태환과 만든 ‘상상트리오’와 함께 딸기소극장에서 인연은 그렇게 다시 이어졌다. 트리오의 연주 위주에, 그는 게스트로 나와 솔로로 프리 재즈를 펼쳤다. 네덜란드, 독일 등지에서 재즈를 공부하던 당시 늘 보고 듣던 형식의 음악이 한국에서 고스란히 펼쳐지고 있었다. 미국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연주 방식이었다.
그는 재즈를 찾아 유럽으로, 미국으로 돌아다녔다. 대학생 시절, 한국 재즈의 산실인 클럽 야누스에 갔다 재즈에 빠진 청년이 택한 노선이었다.
“이판근, 박성연, 조성국씨 등 우리 재즈 1세대의 공연이 펼쳐지던 그 곳에 선생님과 맺어진 연주 인연은 박재천과 펼쳤던 홍대 앞 명월관 공연까지 끊이지 않았어요.” 그가 LA에서 활동할 때는 강태환이 찾아와 그 공연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작은 무대들은 진정한 재즈를 향한 강태환의 모색 중 일부이기도 했다. 강씨가 몽고의 전위 보컬리스트 사인호 남치락과 무대를 펼칠 때는 마침 귀국해 있던 김씨가 당연히 찾아갔다. 2009년 그가 미국 장기 체류를 위해 한국을 뜨기 직전, 강태환에게 인사를 빠뜨리지 않은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몸이 옛날 같지 않다며 부드러운 주법을 개발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들은 게 바로 그 때였어요.”
그가 기억하는 강태환 최고의 공연은 1987년 독일 중부 도시 뫼어스에서 열린 ‘Moers New Jazz Festival’이다.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아방가르드 재즈 페스티벌로 정평 나 있는 무대인데, 당시 자리는 사실 일본의 프리 재즈를 위한 것이었다. 우메즈 가즈히토 등 일본의 최상급 프리 재즈 색소폰 주자 3명이 만드는 무대에 강씨가 합류하는 형식이었다. 그나마 한국의 재즈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고 있는 일본의 재즈 평론가 소에지마 테루토씨의 의도였다.
“2,000여 독일 관객들이 난리를 쳤어요. 동물의 울부짖음 등 그들로서는 상상도 못 하던 소리가 쉼 없이 울려퍼지니, 기립 박수는 당연히 정해진 코스였어요.”
그러나 일본측에서 꾸민 무대라는 근원적 한계 탓에 강씨는 응달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여전히, 그는 아쉽다. 앞으로도, 사그라들지 않을 아쉬움일 것이다. 그것은 한국적 특수성 때문일까, 프리 재즈라는 별난 장르가 감내해야 할 숙명일까? 이를테면 이런 것.
“선생님 옆에 있으면 편해요. 항상 음악 이야기만 하세요. 보통 한 번 만나면 두 시간 정도 함께 있는데, 늘 그 이야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