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베셰, 소프라노 색소폰을 재발견하다

뒷전신세였던 소프라노 색소폰이 본격 재즈 악기로 환골탈태한 것은 시드니 조세프 베셰 덕택이다. 그는 일찍이 1923년 음반에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연주를 남겨 내로라하는 주자로 눈도장을 찍었는데, 그것은 사건이었다. 30여년 뒤 스티브 레이시와 존 콜트레인이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혁명적 접근법을 이뤄 내기 전까지 소프라노 색소폰은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 했다.
그 해 1923년 클레런스 윌리엄스 핫 파이브와의 만든 녹음에서 베셰는 당시 유행하던 뉴올리언스 스타일을 답습하지 않았다. 킹 올리버와 루이스 암스트롱, 아니면 파파 셀레스틴과 키드 샤츠Kid Shots 등 당시 악단의 필살기가 쌍두 트럼펫이던 때였다. 바로 그 당시, 베셰는 소프라노 색소폰을 들고 나와 트럼펫과 맞먹는 자리를 요구했다.
윌리엄스 윌리엄스와의 음반으로 받은 충격에 아랑곳않고 베셰는 향후 8년 동안 가끔씩 일지라도 블루스 가수들과 녹음 스튜디오에서만 노블 시슬과 단 두 번 함께 했을 뿐이다. 이후 간헐적으로 남긴 유럽에서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1932년까지는 주목할만한 취입이 없다. 그러나 그 즈음 그는 고도의 기교에다 화려한 열정적 연주로 동료들을 압도하는 예술적 장인으로 세인들로부터 인정 받고 있었다. 정열, 창조성, 압도적 리듬이라는 삼박자를 만족시킨 예가 Shag
였다.
1930년대 들어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 했던 베셰는 1940년대 얼 하인스, 찰리 셰이버스, 시드니 드 파리와 더불어 뉴 올리언즈 재즈 붐의 주역이 되었다. 이어 1945년에는 클라리넷 주자 메즈 메즈로우의 어깨를 겯고 초창기의 인기에 필적하는 일련의 음반 작업에 착수했다. 여러모로 불화에 휩싸이긴 했으나 백인치고는 흑인들의 감성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인 사례였다. 서두르지 않는 눅진한 동료애 덕에 Gone Away Blues
같은 곡에는 깊고도 진한 정서적 교감이 살아 있었다.
유럽 순회 연주로 유럽에 빠져든 베셰는 마침내 1949년 파리에 정착했다. 프랑스 팀들이 정점에 달해 있던 그를 따라잡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나 당시 베셰가 남긴 일상적 취입에서마저도 프랑스에 들른 미국인들은 영감을 얻었다. 당시 그는 찰리 파커의 음반을 듣고 깊이 감동했는데 새미 프라이스가 이끌던 악단과의 Jumpin’ On 57th
을 분석하면 베셰는 여하한 밴드와도 협연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