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으로 건너간 자유의 언어, 그리고 히피 문화 속 재즈
1960년대
1960년대 재즈의 주류는 하드 밥이다. 그러나 하드 밥만이 전부는 아니다. 물론 하드 밥 재즈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찬찬히 돌이켜봤을 때, 1960년대 초에 일어난 움직임들 가운데 재즈적으로 가장 뜻깊었던 것은 프리 뮤직 운동 free form movement
이다. 프리 뮤직은 태동기의 비밥과 흔히 비교된다.
무엇보다 기존의 것에 대한 거부
라는 면에서 본다면, 그 둘은 흡사하다. 그러나 프리 뮤직이 태동기의 밥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배척받았다. 프리 뮤직은 급진적인, 실로 급진적인 재즈였기 때문이다.
프리 뮤직 전영은 지금까지의 음악과의 완전 결별
을 소리 높이 외치고 나왔다. 그것은 그냥 새롭다
는 차원이 아니었다. 프리 뮤직의 이상은 야성적인 wild
화성 체계에 있었다.
1960년대 미국 사회의 최대 이슈는 흑인 자존 의식의 광범위한 확산
이었다. 흑인 재즈 아티스트들도 물론 거기에 적극 동참했다. 확산 일로에 있던 그 흑인 인권 운동 black power movement
에 아치 셰프 등 재즈 뮤지션들도 하나둘씩 참여한 것이다.
서너 대의 관악기가 나란히 서서 하모니라고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 대위적 contrapuntal 관계를 유지하며 광란에 가까운 연주를 들려준다고 상상해 보라. 의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선율들을 마구 쏟아붓는 그 재즈는 분명 음악 그 이상의 어떤 이념적 무기
였다. 또 당시 열렸던 모든 재즈 콘서트들 또한 하나의 커다란 공동 목표에 기꺼이 동참했다. 즉, 그 거친 질풍노도의 재즈에 정통성을 부여하자
는 것이었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어 시카고 악파 Chicago School
가 결성됨에 따라, 그 재즈는 일반에게도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이제 재즈는 사회적─인종적 주제 의식보다는 추상화된 표현 양식의 개발에 더 비중을 두게 된 것이다. 선 라와 무할 리처드 에이브럼스가 곧 동참, 새 시대 재즈의 선구자로 나섰다.

▲ 사색적이고 풍성한 톤의 재즈 기타로 단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짐 홀. 온갖 기교를 최대한으로 절제하는 그의 기타는 지적인 재즈의 모범이다. 1960년대부터 꾸준히 명성을 쌓아왔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가는 음악은 대중에게 외면당한다. 그 재즈는 그러한 문제를 더 심각하게 겪었다. 그들의 본토 미국에서 차갑게 외면당한 자유 형식 연주인들(free-form players)의 다수는 결국 망명하듯 유럽으로 이주했다. 거기서 정당한 평가를 받기 바랐던 것이다.
그들은 당초에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효과는 거두었다. 즉, 그 미국 전위 그룹의 음악적 경험은 당시 그들과 유사한 실험을 하고 있던 세계 각지의 음악인들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맨 처음, 재즈의 후발국인 유럽은 그 같은 새 음악을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유럽 자유 즉흥 악파(European Free Improvisation School)를 중심으로 하여 미국 친구들이 선도해 낸 어법을 부지런히 배우더니, 결국은 오래지 않아 자신들 고유의 언어를 독자적으로 개발해 내기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큰 목소리를 낸 사람들이 범세계 화합 오케스트라(The Globe Unity Orchestra)와 스판테이니어스 뮤직 앙상블(Spontaneous Music Ensemble, SME), 그리고 개인으로서는 기타의 데렉 베일리, 트롬본의 폴 러더퍼드이다. 이들 모두는 재즈를 추상의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그렇다면 본토 미국은 어떠했나?
당시의 미국 문화는 히피 문화의 대대적 반란(flowerpower rebellion)
으로 요약된다. 그런데 그 여파는 팝 문화 쪽으로는 대단했으나, 재즈에는 거의 영향을 못 미쳤다. 당시 미국의 재즈는 비브라폰 주자 개리 버튼이 이끄는 5중주단의 세련미, 알토 색소폰 주자 존 핸디의 머리에 꽂은 꽃다발처럼 유머러스한
음악, 테너 색소폰의 찰스 로이드로 대표되는 히피식 사랑 파티(love-in)의 천진함이 짙게 밴 음악 일색이었다.
그들의 음악에는 그때까지 재즈의 유산이 모두 진열되어 있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봤을 때, 이 시기의 미국 재즈 뮤지션치고 음악의 전체적 흐름에 이렇다 하게 기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재즈의 기(氣)가 일거에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흘러간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격류에서 구식 재즈인 하드 밥은 찬밥 신세
로 밀려나고 말았던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중앙 무대를 그리 호락호락하게 내주지 않았다. 당시 음악의 흐름을 선도한 것은 프리 뮤직 운동이었으나, 그 와중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들의 길을 계속해서 추구해 나간 원로 재즈 뮤지션이 두 사람 있었다. 그들은 일시적인 차원이지만, 밴드의 멤버들을 서로 맞바꿔 보기도 하는 등 서로 간에 교류를 돈독히 다져 나갔다.
실질적 의미에서 빅 밴드는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러나 바로 앞 세대 빅 밴드의 두 거장 듀크 엘링턴과 카운트 베이시의 명성은 1950년대 말까지도 건재했는데, 특히 엘링턴의 경우에는 끊이지 않고 훌륭한 곡들을 발표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엘링턴 밴드를 제외한 다른 빅 밴드들은 자신들의 화려했던 과거를 회고하는 음악 쪽으로만 파고드는 데 그쳤다. 빅 밴드 재즈는 그야말로 빈사 상태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