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먼 호킨스 (2)

미리 짜두기라도 한 듯 핸더슨과의 합주가 격을 갖추어 간 것이다. 호킨스가 얼마나 보물단지인지 리더는 알아차렸다. `Tve Got To Sing A Torch Song`, `Talk Of The Town` 같은 곡은 콜먼 특유의 찬란한 테너 색소폰을 입증하는 훌륭한 시금석이 되어주었다. 일약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호킨스는 1934년이 되자 운명에 도전하듯 헨더슨을 떠나 유럽으로 떴다. 5년 간 머물며 네덜란드 밴드인 Ramblers, 장고 라인하르트, 스탠리 블랙, 잭 힐튼 등과 함께 연주와 취입 활동을 병행했다. 1938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10월 자신이 꾸린 9인조 악단과 함께 `Body And Soul`을 녹음했다. 낭만적이며 창조적인 테너 색소폰이란 어떤 것인지를 입증한 기념비적 연주였던 그 음반은 당연히 테너 색소폰의 스타 탄생을 알리는 이정표였다.
그 정도가 되면 성취감에 빠져 느긋하게 있을 법도 했지만 호킨스는 당시의 실험 음악이었던 비밥에 주목하고 그들이 개척 중인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일견 공격적으로 비친 그들 특유의 음악 스타일과 생활 방식에 점점 젖어들던 1944년, 자신처럼 신세대들의 재즈에 기웃대던 벤 웹스터에게 그들의 최신 인기곡 `Salt Peanuts`을 예로 들며 비밥의 타이밍이란 문제에 대해 한 수 지도해 주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밥의 노련한 전도사 하워드 맥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Mop Mop`을, 마일즈 데이비스와는 `Bean A Re-bop`을 취입했다.
따져본다면 호킨스의 명성이 초기 밥 운동의 새 흐름을 이용한 데서 비롯된 측면이 있는 동시에 밥의 문법이 그의 이름을 걸고 탄생한 측면 또한 존재한다. 화성적으로 복잡했다는 사실은 호킨스 쪽에서 보자면 새 어법을 보다 쉽게 수용할 수 있는 통로가 제공되었다는 뜻이기도 했으므로, 자유로운 솔로 연주의 길이 열린 것이기도 했다.
1946년 국립 JATP(Jazz At The Philharmonic) 창립 멤버로 참여한 그는 자신의 기호에 따라 잼 세션 풍토를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노먼 그랜츠가 제안한 이 순회 `재즈 서커스단`에 그는 기여를 아끼지 않았는데 1950년대 초반은 그의 취향에 어울리지 않는 음악적 중심 이동이 발현하던 시기였다. 즉 재즈 세계의 무게 중심이 앞다투어 서해안으로 옮겨가고 있었는데, 바로 쿨 사운드가 득세함에 따라 호킨스의 웅장한 톤은 때로 철 지난 유물 신세로 전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달리 보자면 취입의 기회가 줄어들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나름의 고난을 거쳐, 그는 미국에서 펼쳐지는 모든 재즈 페스티벌의 게스트 뮤지션으로 대접받았다.
다행스럽게도 소니 롤린스와 존 콜트레인이 1950년대 중반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그 같은 상황이 오래 펼쳐지지는 않았으니 호킨스의 재림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는 블루스를 더욱 파고들었고 그 결과 1958년에 걸작으로 선정된 `Bird Of Prey Blues`를 프로듀스했다. 가장 급진적 변혁이라고들 했던 두 번째 작품은 60년대가 되어서야 나왔다. 한 번도 프리 뮤직 스타일에 본격 도전한 적은 없었지만 `Picasso`라는 제목으로 비슷한 음악을 무반주 스타일로 시도하기는 했다. 거기서의 연주는 보다 유연한 것이었으며 특집 올 스타 쇼에나 나올 법하게 `Yesterdays`나 `Lowerman` 등 스탠더드 곡을 들고 나와 롤린스 스타일로 예측 불가의 음들로 가득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같은 양상은 뚜렷해지더니 1966년이 되어서야 그는 순회 JATP의 스타 연주자로 선정되었다. 슬프게도 이 즉위식 이후 엄습한 건강 악화로 그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색소폰 연주의 발전에서 그가 끼친 영향은 추종을 불허한다. 40년 넘게 취입 분야에서 탁월성을 견지한 재즈맨은 없다. 호킨스는 테너 색소폰의 아버지로 당당히 추앙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