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 웹

윌리엄 헨리 칙 웹의 삶은 ‘홀리 랜드’(할렘의 사보이 무도장) 그 자체였다. 거기는 인생의 승부처였을뿐더러 나아가 영혼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왜소한 데다 척추 결핵의 후유증으로 꼽추이기까지 했던 그는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빅 밴드 드러머로 추앙받았다. 불과 서른의 나이로 세상을 떴지만 그가 없었던들 재즈 밴드의 사운드는 심드렁한 소리를 벗어나지 못 했으리라.
기적의 아이라도 된 듯 그는 겨우 10대의 나이에 쉽헤드 베이의 볼티모어 보트에 올랐다. 1924년 뉴욕으로 가서 에드워드 도웰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일했으나 2년도 안 돼 자기 이름의 소편성 악단을 이끌게 됐다. 사보이에서 리더로 알려진 것은 1927년이었으나 1931년에는 정규 악단을 이끌었다.
드러머로서의 전설이 일찍이 싹터 올랐다. 스타일은 복잡하지 않았으나 스네어 드럼과 심볼을 엮어가며 자기 스타일로 곡을 밀고 가는 추동력이 주목을 끌었다. 뉴 올리언즈의 장인 뺨치는 민첩함과 밴드의 진행을 부추겨 주는 솜씨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1934년 엘라 피츠제럴드라는 신출내기 가수를 아마추어 대회에서 발탁해 정규 멤버로 내세웠던 자이기도 했다(Forever Young). 밴드의 연주보다 사보이의 명물이었던 ‘배틀’의 주인공은 단연 웹이었던 것이다. 밴드가 국가적으로 알려지면서 공연장마다 녹음의 요청도 이어졌다.
흉막염에도 불구하고 웹의 무대는 이어졌지만 워싱턴 무대로 향하는 배 위에서 그는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