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디 드 프랑코

다른 유파의 스타일로 인기를 구가하던 클라리넷 주자들도 허다했지만 1940~50년대의 재즈에서 클라리넷에 헌신했던 이는 드 프랑코와 토니 스캇Tony Scott 밖에 없었다. 그랬다쳐도 드 프랑코에게는 유럽 평론가들이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다행스럽게도 미국 쪽 평자들에게는 그 같은 견해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당시 음악 잡지들은 1947년 이래로 최고급 그룹의 클라리넷 주자로 버디를 꼽아 왔다.
보나피스 페르디난드 레오나르도 드 프랑코의 음악적 이력은 진 크루파, 찰리 버넷, 타미 도시, 보이드 레이번 등의 빅밴드에서 출발했는데 프랑코가 자신의 운명을 걷어찬 것은 비밥 혁명에 휩쓸리면서부터였다. 새 음악은 허튼 상상 이상이었다. 찰리 파커를 자기 식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기술적 문제의 차원을 뛰어넘었다. 통념적 음악을 벗어난 클라리넷의 사운드는 공허해졌거나 쇳소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미증유의 문제에 직면한 프랑코는 전혀 이질적인 음악으로 응수했다. 선명하고도 유려한 선율로 모차르트의 영롱한 변주곡을 연상케 했다.
1950년대 초에 그가 답안으로 제시했던 소편성 그룹은 피아노의 케니 드류, 드럼의 아트 블레이키와 테디 코티크로 이뤄진 팀이 들려주는 Buddy’s Blues나 Carioca 같은 곡들로 놀라운 연주력으로 새 차원의 재즈를 들려주었다. 드 프랑코의 변신은 1956년 아트 테이텀과의 Deep Night 연주에서 빛났다. 1964년 Jazz Messengers와의 작업으로 그의 베이스 클라리넷 실력이 새삼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Blues Connotation은 미래를 내다보는 연주자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수립한 계기였다. 1960년 이후 5년간 음악 교육에 매진한 그는 1966년 이후 1974년까지는 글렌 밀러 오케스트라와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