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부의 슬픈 노래 — 빌리 홀리데이의 수난 시대

1920-30년대 극심한 인종차별 속에서도 재즈는 흑백 간 진정한 공감대를 형성한 유일한 통로였다. 재즈 디바 빌리 홀리데이는 백인 전용 호텔에서 쫓겨나고, 심지어 얼굴에 검댕칠까지 해야 했던 비극적 수모를 겪는다. 그러나 그녀는 마이크를 혁신적으로 활용, 인간의 목소리를 재발견하며 음악사에 한 획을 그었다. 검은 피부로 슬픔을 노래하고 혁명을 이끈 빌리 홀리데이의 처절하고도 위대한 발자취를 따라간다.

In a nutshell

    검은 피부의 슬픈 노래 — 빌리 홀리데이의 수난 시대

검은 피부의 슬픈 노래 — 빌리 홀리데이의 수난 시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려운 이야기는 못해요. 이렇게 귀를 통해서 멜로디를 자기 몸속에 넣으세요. 못 믿을 게 인간의 말이라지만, 멜로디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으니까요」

인종 차별의 벽

미국 사회에서 인종 편견의 벽은 거기에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얼른 피부에 와닿지 않을 정도로 높다. 뜻하지 않게 툭툭 불거지는 이 장벽을 깨부수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이 최초로 구체화된 것이 바로 재즈를 통해서였다. 재즈는 일단 한번 그 맛을 알고 나면 멀리하기 힘든 무서운 마력을 지닌 대중 예술이다. 재즈를 통해서, 흑백 간에 최초로 진정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어떤 음악을 진정으로 좋아하게 되면, 그 음악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경이와 감탄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재즈는 작곡자의 예술이 아니라 연주자의 예술인지라, 그 같은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어 있다.

극심한 인종 차별적 편견 속에서 교육받아 온 백인들이 흑인도 존경할 만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맨 첫 계기가 바로 재즈였던 것이다. 멸시의 대상, 그 이상은 될 수 없다고 믿어온 흑인들이 그처럼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백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이후 이 검은 물결은 스포츠와 팝 음악 분야 쪽으로도 확산되어,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1920~1930 년대에는 인종 차별의 폐해가 특히나 심각했다. 그러나 재즈의 세계는 예외 지대였다. 그 당시 일반 사회는 흑백의 반목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재즈를 하는 뮤지션들은 그 같은 관습으로 터 상당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 당시에도 피부 색깔을 뛰어넘는 굳건한 우정의 가교가 재즈 뮤지션 사이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나 백인 밴드의 리더로서는 자기 악단에 흑인 악사를 들인다는 일에 나름대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초기의 흑인 뮤지션들에게는 그와 관계된 씁쓸한 기억이 적어도 한두 가지씩은 어느 누구에게나 다 있게 마련이다. 떠돌이 생활로 연명해 가던 흑인 악사들에게는 그런 냉혹한 현실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그들의 일상이었다고 봐도 별 무리 없다.

재즈 최고의 가수 빌리 홀리데이가 인기 백인 악단인 아티 쇼 밴드 Artie Shaw’s Band 시절 겪어야 했던 수모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다음의 예화는 빼어난 음악성에도 불구하고, 검은 피부를 타고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홀리데이가 겪어야만 했던 그 숱한 수모들 가운데 사소한 하나일 뿐이다. 그 악단이 웨스트버지니아의 파커스버그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그 순회 연주 tour에서는 어쩌다 보니 빌리와 동행하는 일이 퍽 잦았다. 파커스버그에 도착했을 때였다. 시내에 당도하자, 수석 단원이자 당시 인기 최고의 드러머이기도 했던 주티 싱글턴 Zutty Singleton 이 우리더러 흑인 전용 호텔에서 묵으라고 말했다. 또, 빌리도 차에서 내려 그리로 가라고 했다.

즉, 우리는 저 아래 남부 출신 down South이므로 시내의 백인 전용 호텔 white only hotel에서는 묵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빌리는 그러나, 이번에는 그냥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과연 그런지 호텔에 가서 자기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녀가 겨우 들을 수 있었던 대답이란 방이 없다는 말이 전부였다.

결국 우리는 주티가 잡아놓은 최하급 호텔로 털레털레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자리를 비운 그 사이, 그는 목욕탕 딸린 독방을 잡아놓고는 거기서 느긋하게 쉬고 있었다.

당시 불과 몇 분 동안이었지만, 빌리는 너무나 분통이 치밀어올라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주티라는 그 인간에게 도저히 감당해 내기 힘든 혐오가 끓어오른 것이다.

(존 베스트의 회상)

그 같은 인종 차별의 문제는 비단 남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빌리가 같은 흑인인 베이시 악단에 있을 때, 디트로이트의 폭스 시어터(Fox Theater) 공연 당시의 일이다. 이제, 본인의 육성을 들어보자.

첫째 날, 세번째 공연이 끝나자 극장 지배인은 머리 끝까지 골이 나 있었다. 흑인 출연자들이 반라(半裸)의 백인 여자 댄서들과 무대 뒤에서 제멋대로 시시덕거리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이미 짜여 있던 공연 콘티가 졸지에 고쳐진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고 다들 수군댔다. 우선, 무희들의 숫자가 대폭 줄었다. 또, 합창단원들의 얼굴은 검정 분장을 하고, 흑인 유모(mammy) 차림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결국, 흑인 백인 할 것 없이 얼굴에 검댕질을 하고 나왔다. 또 모두가 부엌데기 차림이었다.

조금 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게 된 우리의 리더 베이시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그러나 당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이미 출연 계약을 해둔 터라, 극장 지배인이 아무리 제멋대로 해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매니저가 베이시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저 가수는 살색이 너무 노랗잖아. 당신네 흑인 단원들하고 한 무대에 설 수 없겠는데. 광선이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백인인 줄 오해하기 딱 좋군」

이 말을 듣고는 누군가가 새까만 색 크림을 내게 갖고 와서는 그걸 바르라는 것이었다. 이제, 내가 머리 끝까지 화날 차례였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버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자루를 쥔 쪽이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사정은 이러했다. 즉, 만일 내가 뜻을 굽히지 않을 경우, 당시 함께 계약한 나머지 단원들 모두가 내일 당장 굶어죽을 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얼굴에 검댕 칠을 했다.

쇼는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디트로이트의 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흥청망청 무르익어 갔다. 우리 흑인 연예인들끼리 틈만 나면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쇼 비즈니스처럼 개판인 동네는 없다 There’s no damn business like show business」고…

그런데 당하고 보니, 과연 그랬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시키는 대로 하고, 또 잠시라도 웃음을 멈추어서는 안 되는 데가 바로 거기인 것이다.

피부 빛깔 때문에 이렇듯 기구한 경험을 해야 했던 홀리데이는 그 섬세하고 애절한 창법으로, 재즈 보컬의 최고봉으로서 추앙받고 있다. 그 같은 내용적 측면 못지않게 중요한, 그러나 간과하기 쉬운 기술적 측면이 있다. 그녀는 마이크로폰이 지닌 잠재력을 최초로 실현시킨 가수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음악의 발달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빌리 홀리데이는 인간의 목소리를 완전히 새롭게 재발견해 낸 가수인 것이다. 그녀의 창법은 목소리를 마이크에 실어 보내는 microphonising 작업에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할 신기원을 이룩해냈다. 그러므로 그녀의 노래는 마이크라고는 도구를 떼놓고는 존재할 수 없다.

홀리데이의 마이크 창법 microphonic style은 멀지 않아 팝 장르로 확산, 일반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