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개종과 유럽 망명 — 차별을 넘어서려는 몸부림

1960년대 미국, 흑인 재즈맨들은 인종 차별의 질곡에서 벗어나려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유럽으로 망명하는 등 처절한 몸부림을 이어갔다. '나는 백인이다!'를 외치며 새 삶을 꿈꿨던 그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와, 인종의 벽을 넘어 모두의 음악이 된 재즈의 진정한 의미를 탐색한다. 유럽에서의 또 다른 편견, 그리고 재즈 내 인종 분리 논란까지, 복잡한 인종 문제를 겪었던 재즈맨들의 고뇌를 생생하게 담는다.

In a nutshell

    이슬람 개종과 유럽 망명 — 차별을 넘어서려는 몸부림

이슬람 개종과 유럽 망명 — 차별을 넘어서려는 몸부림

일부 흑인 재즈맨들은 미국에 만연해 있던 인종 편견의 질곡을 이런 식으로 헤쳐 나가기도 했다. 디지 길레스피의 회고를 들어보자.

1960년대로 접어들자, 재즈 음악인들 사이에서는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일이 열병처럼 번져 나갔다. 그 광범한 사회적 현상의 밑바닥에는〈종교적 자유〉에의 갈구가 두텁게 깔려 있었다.

이슬람교로 개종한 최초의 재즈 뮤지션들 가운데 에드거 헤이스 Edgar Hayes 악단의 루디 파웰 Rudy Powell이라는 사람의 예를 들자면 이렇다. 이슬람을 받아들인 뒤, 그는〈아미디야 무슬림 AmidyahMuslim〉이라고 개명했다. 그 같은 사정은 그 외 다른 뮤지션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현상의 근본 원인들 중 가장 큰 것이 무엇인지 꼬집어 내보라고 한다면, 나는〈종교적〉이라기보다는〈사회적〉동기라고 답하겠다.

「이봐. 회교로 개종하는 그 순간, 너는 더 이상 검둥이가 아니야. 백인이 되는 거라고」

그들은 말하고 다녔던 것이다.

「새 이름을 얻는 그 순간부터, 너는 깜둥이 신세를 면하게 되는 거야. 새 세상이 열리는 거지」

그러자, 너도나도 개종의 대열에 동참했다. 당시는 흑인 차별 풍조가 특히 더욱 극성을 부려대던 때였다. 그러한 때, 그것은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주변의 어느 흑인이 회교로 개종하고 나자, 백인 레스토랑에 씩씩하게 들어가서 샌드위치를 시켜 먹어도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그런데 그는 특히나 더욱 검은 흑인이었다.) 그 일을 전해 들은 흑인들이 떼를 지어 개종 신고를 하는 일이 곧 벌어졌다.

뮤지션들에게 일대 유행이 불어닥쳤다. 즉, 경찰에 올라가 있는 개인 신상 기록 카드의 인종 기재란에 너도나도 W라고 기재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백인 White이라는 말이었다.

케니 클라크도 그중 하나였다. 어느 날, 그는 그 카드를 내게 보여준 적 있다. 그는 내게 뽐냈다.

“이봐, 검둥이 친구. 나는 이제 깜둥이가 아니야. 나는 백인이야. 자, 봐. W 맞지? See, nigger, I ain’t no spook. I’m white, W”

그는 이름도 아랍 식인 리아 카트 알리 살람 Liaqat Ali Salaam으로 개명했다.

끝으로, 로린 버그에 있을 때 함께 방을 쓴 올리버 메셰 Oliver Mesheux라는 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델라웨어에서 인종 문제 때문에 한바탕 일을 겪게 되었다.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식사를 주문했다. 그런데, 웨이터가 자기 식당에서는 유색 인종을 모시지 않는다면서 난색이었다.

그 말에 메셰가 대꾸했다.

“이 식당 규칙이 그렇다니, 당신을 탓하진 않겠소. 그러나 나를 단순히 흑인 취급하지는 마시오. 내 이름은 무스타파 달릴 Mustafa Dalil이오”

이 말에, 그 웨이터의 태도가 확 돌변했다.

“어서 옵쇼”

그러나 바다 건너 유럽에서의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미국에서 온 흑인 재즈 뮤지션에게 그토록 친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 매료당한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이 유럽으로 이주했다.

물론, 편견이란 어느 사회에건 다 있게 마련이다. 듀크 웰링턴 악단이 스위스 순회 연주를 할 때의 일이다.

1967년, 엘링턴 밴드의 취리히 연례 연주회 때의 일이다. 단원인 해리 카니(Harry Carney)와 레이 낸시(Ray Nance)가 묵고 있던 호텔 옆의 시계 • 보석상점에 들렀다. 두 사람은 유명한 스위스제 시계를 꼼꼼히 쭉 살펴보았으나, 그 자리에서 얼른 결정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뒤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뒤, 그 점포를 떠났다.

그런데 그들이 나가고 몇 분 뒤에 그 집 주인이 보니, 보석 세 개가 사라진 것이 아닌가! 일이 그렇게 되자, 그 점포 주인과 점원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곧 이렇게 결론 내렸다. 〈그걸 훔쳐 갈 사람은 그 두 흑인뿐〉이라고.

그들은 그 사람들을 잡기 위해 곧 점포 밖으로 달려 나갔다. 곧 얼마 안 가서 해리와 레이가 눈에 띄었다. 그들은 겨우 한두 블록 떨어진 거리에서 다른 점포들을 기웃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곧 붙들려 다시 점포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러고는 대기하고 있던 경관에게 몸 수색을 당하고는 경찰서로 직행되었다. 그들은 거기서 꼼짝없이 붙들려서 미주알고주알 심문당해야 했다. 한참 뒤, 그 가게 주인이 경찰서로 전화를 걸어왔다. 문제의 그 보석들을 다시 찾았는데, 알고 보니 그 가게의 점원 아가씨가 엉뚱한 자리에 놓아두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제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런데 억울하게 끌려다닌 두 사람에게는 경찰로부터도, 또 그 가게 주인으로부터도 일언반구의 사과도 없었다. 훗날 카니는 그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그 가게 주인이 어찌나 유난을 떨던지, 나는 되레 그 호들갑이 참 안돼 보였어요. 그가 마음의 상처를 얼마나 크게 입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나는 거기에 다시 갔어요. 그러고는 그 집에 진열된 시계 가운데 가장 비싼 놈으로 하나 샀지요. 그제야 그 주인의 얼굴이 펴지더군요. 그걸 보니, 내 마음도 풀어졌어요」

미국 사회에서 민권 운동이 더욱 가열차 감에 따라, 흑인 재즈 뮤지션들의 일부에서는〈재즈는 흑인들만의 것〉이라는 소리도 점점 높아갔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재즈라는 음악은 이미 흑백 가릴 것 없이 모두의 재산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좋은 문화란 일단 유포되기 시작하면, 확산 속도는 그 어느 누구도 걷잡을 수 없게 마련이다. 바로, 재즈가 그러했다. 그럼에도, 일부 흑인 뮤지션에게는 백인 사회를 향한 앙금이 조금도 씻기지 않고 있었다. 조 고든 Joe Gorden이 백인인 셸리 메인 Shelly Manne이 이끄는 그룹에 들어갔을 때, 그의 흑인 친구들이 걱정된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백인에 대한 반감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흰둥이 악단에 들어가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또, 색소폰 주자 소니 롤린스가 백인 기타리스트인 짐 홀을 불러들였을 때도, 기다렸다는 듯 롤린스에게 욕이 퍼부어졌다. 또, 마일스 데이비스가 백인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를 불러들였을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 장본인 데이비스는 평소부터 그런 식의 인종 분리적 태도를 한심한 눈으로 지켜봐 오던 터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몇 년 전 내가 리 코니츠(백인 색소폰 주자)를 맨 처음으로 불러들였을 때도 사정이 비슷했다. 당시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왜 당신의 밴드에 흰둥이 ofay를 끌어들이는 거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코니츠의 음색을 낼 수 있는 색소폰 주자가 있으면, 어디 한번 소개해 줘봐라」

그따위 얼토당토 않은 걱정으로 골치를 앓는다는 생각에 미쳤더라면, 나는 밴드 따위는 아예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되겠는가? 즉, 제일 중요한 문제는 결국 얼마나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는가라는 데 있다고! 만에 하나, 피부색은 시퍼런 데다 입에서는 붉은 김이 나온다손 치더라도 그 이치는 변함없다.(홀, 에번스, 코니츠 모두 백인들이지만, 그 기량은 흑백을 통틀어 당대 최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