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광고 속 재즈 선율 — 90년대 한국, 재즈는 환경이다

90년대 한국 TV 광고에 재즈 선율이 흘러넘치던 시절을 기억하는가. '까다로운 대중음악'으로 여겨지던 재즈가 코오롱 벨라, 레쓰비, 씽씽 청소기 등 일상 속 광고를 통해 우리의 '환경'이 되어간 과정을 추적한다. 재즈 음악, 재즈적 분위기, 심지어 재즈라는 이름까지 차용한 광고들이 어떻게 90년대 한국 사회에 '재즈 붐'을 일으키고, 재즈를 '접할 수밖에 없는' 일상으로 만들었는지 그 흥미로운 현상을 파헤친다.

In a nutshell

    TV 광고 속 재즈 선율 — 90년대 한국, 재즈는 환경이다

TV 광고 속 재즈 선율 — 90년대 한국, 재즈는 환경이다

생활 속의 재즈 사물들은 모두가 하나의 기호 sign이다. 다만, 일상 속에 파묻혀 그 의미를 읽어내지 못할 뿐이다.

같은 이치로, 조금만 신경 쓴다면 생활 속에서 재즈라는 기호가 이렇듯 풍성하게 널려 있다는 사실을 별 힘 들이지 않고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다만 그것들을 무심코 보아 넘길 따름인 것이다. 그 무심코 보아 넘김은 매일 접하는 사물들과 우리가 관계 맺는 방식이기도 하다.

1994년 하반기의 TV 광고 어법에는 재즈적 이미지가 특히 넘쳤다. 바꾸어 말하면 이 말은 재즈 음악 또는 재즈적 분위기가 광고 속에 만만치 않게 쓰이고 있는 현상이, 별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데도 자꾸만 눈에 뜨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굳이 강조할 필요조차 없는바, TV는 우리가 눈만 뜨면 접하는 ‘환경’이다. 그리고 광고는 그 ‘자양분’이다. 그 광고가 재즈 또는 재즈적 이미지를 널리 차용하게 되었다면, 그래서 우리가 부지불식 간에 재즈와 일상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면, 재즈에 대하여 1990년대 이후의 한국인들이 맺게 되는 관계 양태는 ‘접하게 되는’이 아니라 ‘접할 수밖에 없는’이 맞다. ‘왠지 까다로운 대중음악’이라고 여겨져 왔던 재즈가 이제는 우리의 ‘환경’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먼저, 그러한 광고들을 순서 없이 나열해 보자.

  • Agua de Beber(아스투르드 주베르투): 코오롱 벨라(숙녀복).
  • Twilight Zone(맨해튼 트랜스퍼. 혼성 4인조 재즈 보컬 그룹): 로치 베이트(바퀴벌레 약).
  • Java Jive(맨해튼 트랜스퍼): 레쓰비(캔커피).
  • I’m a Fool to Want You(빌리 홀리데이): 포트폴리오(숙녀복).
  • Girl from Ipanema(스탠 게츠): 띠아모(대우 통신).
  • Vocalese(맨해튼 트랜스퍼): 페리엘러스(숙녀복).
  • Fine and Mellow(빌리 홀리데이): 제크(롯데 제과 크래커).
  • Sing, Sing, Sing(베니 굿맨): 씽씽 청소기(금성).

이 곡은 6.25 당시 미군들이 주둔지마다 유행시켜 널리 퍼뜨린, 그래서 한국의 전쟁 세대들에게는 유서 깊을 수밖에 없는 곡이다. 아주 어려서라도 6.25를 직접 경험한 세대, 즉 현재 실질적인 경제력(또는 영향력)을 지닌 기성 세대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 선율에다 노가바(가사 바꿔 부르기)식으로 제품에 선전 가사를 붙였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 청소기의 상표명이 다름 아닌 씽씽이기 때문이다. 즉, 동글이 청소기 씽씽이다. 이제, 그 곡이 같은 이름의 제품을 선전하는 음악으로 택해진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재즈적 분위기가 넘치는 광고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여럿 보인다. 특히, 키친 아트의 경우는 현역 재즈 드러머인 임헌수 씨를 출연시키기도 한다. 자기 회사의 주방 기기들을 드럼 세트처럼 둥글게 쭉 펼쳐놓고, 그 안에 임씨를 세워두고는 신나게 두들겨대도록 한다. 다 끝나고 나면 임씨가 드럼 스틱을 쥐고는 바로 머리 위를 쳐다보며 양팔을 쫙 펼치는 것이다. 동시에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타이틀까지 곁들인다.

재즈 음악가 임헌수

스윙 칩이라는 스낵 광고에서는 사람들이 빽빽한 카페 무대에서 한 재즈 뮤지션이 나와 색소폰을 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1994년 8월, 그 같은 추세의 절정을 신문의 한 광고에서 확인하게 된다. 바로, 어느 립스틱의 전면 칼라 광고가 그것이다. 이제 상품 이름에서부터 재즈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럭키 드봉 화장품의 아티스테 재즈 와인 560이 그것이다. 와인처럼 감미롭고 재즈처럼 달콤한 가을의 립스틱임이 다음과 같이 형상화되는 것이다.

그 광고의 메인 카피는 이렇다.

올 가을, 재즈 와인의 유혹에 빠져든다.

그 바로 앞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보인다. (중략) 가을은 재즈 스타일(중략) 호소력 짙은 재즈 선율처럼(중략) ‘아티스테 재즈 와인’이 이 가을을 유혹하고 있다.(중략)끝은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가슴속을 파고드는 음악 재즈처럼(중략) 이 가을, 유혹적이다. 왼쪽 위 한 켠에는 가장 재즈적 악기인 테너 색소폰을 느슨하게 잡고 서 있는 한 남자가 정면을 주시하는 사진을 콜라주해 두었다. 그리고 이어, 왼쪽 위의 남자를 없애고 여자가 소프라노 색소폰을 안고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대형 포스터가 시중의 화장품 대리점 곳곳에 나붙기 시작한다.

또 이 광고는, 곧 출연진과 그 개념 그대로 TV용으로 제작되어 전파를 탔다. 신문 광고에 등장했던 그 배우가 그 차림대로 나와, 색소폰을 만지는 것이다. 시각 • 청각이 모두 동원되는 TV이니만큼, 이번에는 배경 음악도 함께 깔렸다.

시청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나, 제목은 알 수 없었을 그 곡은 맨해튼 재즈 퀸텟 Manhattan Jazz Quintet의 1985년작 보사 노바를 회상함 Recado Bossa Nova이다.

그리고 역시 같은 상품의 다음 TV 광고에서는 그 곡을 배경으로 이정식이 캄보에서 소프라노 색소폰을 연주하는 모습이 잠시 나오기도 했다. 이정식은 1980년대 말부터 한국의 재즈를 대표하는 총아로 본격 군림하고 있다.

결국, 그 광고는재즈와 와인이란 사물을삶의 질을 보다 더 높여주는 구체적 계기의 상징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집중적 홍보를 두고,광고 포화 ad saturation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재즈 와인이 성가를 높여가던 그즈음, 남성 정장빌트모아는 TV 광고에서 영화 모 베터 블루스 Mo’ Better Blues에 나오는 솔 재즈풍의 유명한 주제가를 배경 음악으로 깔았다. 뮤트를 단 트럼펫이 연주하는 테마 선율이 참으로 정겹다. 이 영화는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 차별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과제를 지상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영화 작업을 통해 실천해 오고 있는 흑인 감독 스파이크 리 SpikeLee가 1990년에 발표한 역작이다.

또, 1995년 9월 초부터 TV 선전을 시작한 빙그레의떠 먹는 요구르트 슈퍼 100은 그 배경을 재즈 녹음 스튜디오로 잡고 있다. 그곳이 재즈 녹음 스튜디오라는 사실은 연주 중인 뮤지션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녹음 스튜디오의 투명 방음벽은 그 안의 모습을 훤히 보여주는 것이다.

결정적인 단서는 무엇보다, 그중 한 뮤지션의 악기가업라이트 어쿠스틱 베이스라는 사실이다. 대중음악일 경우 그 악기는 재즈에서만 쓰이는, 그래서재즈의 상징이기도 하다.

또 같은 시기에 유지 회사 동산 시엔지는트리시스라는 새 샴푸를 홍보하는 TV 선전에서 케니-지의 소프라노 색소폰 음악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그 광고에서는 단 한 프로에 출연하여 젊은 층의 폭발적 인기를 독점, 이름 석 자 뒤에신드롬이라는 수식어가 고유 형용사처럼 따라붙게 된 탤런트 차인표가 그 드라마 속의 분위기 그대로 등장하였다.

케니-지의 재즈는 한국에서 특히 인기가 높다. 그의 발라드 재즈는 20세기 말의 메인 스트림 재즈와는 거리가 멀지만, 가끔 우리나라에서 방송되는 재즈 특집 프로에서 __권위자__로 그려져 도움말을 주는 등 한국에서는 인기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를 잠재적 구매자에 대한 __설득__으로 연결시킨 것이 그 광고이다. 차인표와 케니-지라는 한국에서의 인기인들이 재즈를 매개로 하여 하나로 뭉뚱그려져 __기호화__한 것이다.

그러고는 곧,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들었다. 아침 저녁으로 느껴지는 쌀쌀한 바람에 재즈의 따스함이 더욱 정답게 느껴진다. 하절기에 다소 뜸했던 __광고 음악으로서의 재즈__가 다시 포문을 연 것이다. 정장 제조 판매 업체인 논노의 신사복 __더 스팅__의 광고가 바로 그것이다.

그 광고의 음악은 스콧 조플린의 너무나도 유명한 래그타임 엔터테이너의 피아노 솔로이다. 잘 알다시피, 그 곡은 영화 스팅의 주제곡으로 쓰이면서 새삼 엄청나게 대중적 인기를 끈 바 있다. 이제 한국에서 그 곡은 영화 이름뿐만 아니라, 동명 상품 광고에서의 배경 음악으로도 다시 등장한 것이다. 그 유서 깊은 음악에 맞게 화면도 거친 톤의 흑백 영상이 등장한다.

그 무렵, TV에서는 재즈 와인 광고가 전과 똑같은 내용으로 TV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또, 숙녀화 에스콰이어의 포트폴리오 역시 전과 같이 빌리 홀리데이의 당신을 원했다니 나는 바보I’m a Fool toWant You를 배경 음악으로 깔고 있다. 이번에는, 빛바랜 컬러 사진을 연상케 하는 담채의 복고적 영상을 쓰고 있다.

또, 스킨 텍스라는 피부 보호용 고무장갑도 선전에서 칙 코리어의 작품을 도입한 TV 광고를 11월 들어 내보냈다. 칙 코리어의 앨범『영원에로의 회귀Return to Forever^오늘은 뭘 하고 놀까 ? What Game Shall We Play Today?라는 경쾌한 보컬 작품이 그것이다.

위에 든 사례들이광고 속의 재즈를 일일이 다 취합한 것이라고 자신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일견 즉흥적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진지하게 새겨보아야 할 것은 1980년대 들어 점점 더 가속화하는 사회 • 문화적 현상의 일단을 생활의 주변에서 그처럼 별 힘들이지 않고 포착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추세란 한마디로 요약해 보자면,재즈에 대한 범사회적 승인이라 할 수 있다. 바야흐로, 알게 모르게, 또는 좋건 싫건 간에 재즈에포위되어 사는 시대가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 같은 추세를, 광고 기획자들은 놓치지 않은 것일 따름이다. 그들 광고 기획자들은 세상 물정의 변화 —— 또는 시대의 요구 ——에 특히 민감하고 때로는 그것을 선도하여, 결국에는 자본의 논리 속으로 포용해야 하는——즉, 구매 의욕을 부추겨야 하는——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새삼 상기시켜 둔다. 그 전략에서, 재즈가 대단히 유용한 도구로 쓰였을 따름인 것이다.

이들광고의 어법, 혹은잠재적 수요자를 설득하는 방식을 두고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불어닥친한국판 재즈 붐의 현현이라 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1990년대 초에 본격 개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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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이래 세계 재즈 기타계를 완전 석권해 오고 있는 팻 메스니.

특히 1995년 10월 5일 밤, 그와 그의 그룹 PMG가 가졌던 첫 내한 공연에서 한국의 팬들이 보였던 그 뜨거운 열기는 한국의 재즈 열풍을 그대로 실증해 주었다.

한국에서 재즈라는 대중문화 기호가 이들 광고에서지극히 한국적인 방식으로형상화되어 있는 것이다.

자, 이쯤 해서 몇 가지 질문으로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그 같은 광고, 즉 재즈적 이미지를 적극 도입한 대중 설득 수법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1990년대로 접어들자, 재즈에 대해 전례 없이 늘어난실수요(實需要)의 증가는 우발적 -독립적 현상일 따름인가, 아니면 한국 사회 전체의 문화적 -구조적 추이를 반영하고 있는가?

그 같은 의문이 우문(愚問)은 아니라는 사실은 얼마 뒤 등장한 한 TV 광고에서 잘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쭉 예를 든 광고들은 모두 단일상품 광고였다. 특정 제품을 홍보하는 데 재즈를 유용하게 동원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자기 회사의 전체 이미지를 홍보하는 데에도 재즈가 전면에 강하게 부각된 광고가 곧 등장하였다. 1995년 4월에 전파를 단 인켈의 광고가 곧 그것이다.

당시 인켈은 그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특정 신상품의 선전이 아니라,우리는 오디오 전문 업체라는 사실을 홍보하는 TV 광고에서 케니-지라는 세계적 인기 재즈 뮤지션을 내세웠다. 케니-지가 인켈의 신형 오디오 세트 앞에 앉자 「인켈]이라고 짧게 한마디 하는 것이다. 그 옆에는 물론, 그의 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소프라노 색소폰이 뉘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