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의 어린 시절 — 냉대와 조롱 속에서 싹튼 거장의 꿈
파커가 버드 bird
라는 별명을 갖게 된 내력은 앞서 밝혔다. 우스꽝스럽게도, 그 단어가 원래 지칭한 것은 새
가 아니라 닭
이었다. 그 일화를 통하여, 그와 그 주위의 풍경을 조금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가 남긴 그 흥미진진한, 또한 쓰라린 삶의 편린들 속으로 좀더 들어가 보자. 이 일은 재즈라는 예술을 진지하게
, 즉 삶의 방식으로서
이해하기 바란다면 거치고 지나가야 한다.
파커는 훗날 진정 위대한 뮤지션으로 받들어졌으나, 초창기에는 기초도 없는 애송이
라는 빈정거림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나중에 그런 이야기들을 종종 했다. 본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내가 색소폰으로 조옮김하는 법을 배울 때였다. 예를 들어, G-키(사 장조)의 곡을 실제 연주회에서는 F-키(바 장조)로 바꾸어 연주하는 식 말이다. 그런데, 그때부터 나는
이 곡에서는 이 키로 연주해야 한다
는 식의 고정 관념에 깊은 회의를 품고 있었다.그 문제에 대해 나대로 어느 정도 확신이 생긴 나는 색소폰을 들고 클럽으로 갔다. 예상했던 대로 악사들이 여러 명 있었다. 먼저 그들이
연인 Body and Soul
을 연주했다. 그래서 나는 평소 연습해 온 대로인동덩굴장미 Honeysuckle Rose
로 그 선율을 받았다.그러자 그들은 배꼽을 쥐고 웃더니만, 나를 밖으로 내쫓았다. 그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가 얼마나 요란했던지, 내가 그 클럽에서 나가고 한참 뒤에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 일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약간의 음악적 설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일반에게 잘 알려진 발라드인 연인
은 당시 일반적으로는 G-키로 연주하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악사들이 파커라는 신출내기를 향해 그 곡을 연주한 것은 곧 생판 처음 보는 그에게 문제 하나를 던진 셈이다. 어디 한번 받아보라
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기(氣) 싸움
이기도 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들 예인 세계 내에서의 독특한 수인사법(修人事法)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 문제
를 받은 파커는 관례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즉, 그는 키를 바꾼 것은 물론, 곡목까지 바꾸어 받은 것이다. 그러자 그 악사들이 어리둥절해진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그들이 그 연주를 듣고 파커에게 보낸 반응, 즉 냉소와 박대
는 파커가 이후 평생 동안 겪어야만 했던 고난의 조그마한 서곡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날 파커와 함께 연주하던 일급 드러머 조 존스(Jo Jones)가 공연 끝 부분에서 자기 드럼 세트에 걸려 있던 심벌즈를 벗겨 내고는 파커의 발 앞으로 와장창 냅다 내팽개쳐 창피를 준 일화는 유명하다. 그때 사람들은 그 꼴을 보고는 모두 다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다음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악사 에디 베어필드(Eddie Barefield)가 훗날 들려준 또 다른 짤막한 회고이다. 그 역시 배꼽이 찢어져라 웃었던 것은 물론이다.
파커가 연주하는 것을 실제로 본 것은 그때 캔자스시티에서가 처음이었다. 당시 약관이었던 그의 연주는 너무 엉망이어서 우리 모두는 팀에 넣기를 꺼렸다.
창피를 당한 파커는 오클라호마로 가서는 버스터 스미스(Buster Smith)와 여섯 달 동안 붙어 다녔다. 스미스는 열과 성을 다해 파커를 가르쳤다. 그 후 여섯 달 뒤에 나타난 파커는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파커가 맨 처음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캔자스시티에서였다. 그러나 당시 그 도시는 연예 도시로서는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찰리는 그래서 시카고 쪽의 사정이 알고 싶었다. 그런데 빈털터리였던 그는 궁여지책으로 화물 열차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시카고에서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드러머 아트 블레이키(Art Blakey)가 말한다.
시카고에 닿자 열차에서 내리고는, 다짜고짜 얼 하인스의 연주를 들으러 간 그는 완전한 촌닭이었다. 제일 먼저 분장실로 성큼성큼 들어오더니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색소폰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색소폰 한 대가 마침 밖에 놓여 있었다. 파커는 그것을 보고는 다짜고짜 색소폰에 달려들어 연주하기 시작했다. 무임승차에다 끼니마저 거른 꾀죄죄한 행색 그대로.
그 색소폰의 주인은 얼 하인스와 함께 연주하고 있는 자로서, 별명이
건달 Goon
인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웬 젊은이가 자기 악기를 만지고 있더라는 말을 들은 그는 먼저 외마디 소리부터 버럭 질렀다.
아니, 뭐야?
그러고는 낡아빠진 색소폰 한 대를 거지에게 적선하듯 파커에게 아무렇게나 던져주고는 무대 밖으로 내쫓아 보내고 말았다.
그 비슷한 이야기도 제법 있다. 그런데 군 가드너 Goon Gardner가 당시 적을 두고 있던 데가 하인스의 악단이 아니라, 킹 콜랙스 King Kolax 악단이었다고 하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이다.
당시 시카고의 럼-부기 클럽 Rum-Boogie Club에서 파커의 연주를 처음으로 듣게 된 사디크 하킴 Sadik Hakim — 이 이슬람식 이름은 훗날 개명한 것이다. 당시의 미국식 이름은 아곤 손턴 Argonne Thornton이었다 — 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초창기의 버드에게는 리허설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촉박했던 그는 쇼 시작 시간보다 2, 3분 일찍 와서
분위기
를 살펴보는 것이 일과였다. 제3알토 색소폰 자리라도 주어지기를 바라면서 리더를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어느 날, 그러던 파커에게 드디어 요행으로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무대에 서게 된 그는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평소에 연습해 둔 대로 즉흥 변주를 해나갔는데, 청중들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참신할 수 없었다.
지미 도시 Jimmy Dorsey가 셔먼 호텔에서 연주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밤이었다. 버드가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들은 그는 당장 그 연주를 들으러 왔다. 버드의 밴드 리더는 그 소식을 듣자, 또 무슨 일이 터지겠구먼
하고 생각했다.
도시는
체로키 Cherokee
를 청했다. 파커가 리더로서 곡을 이끌어줄 것을 부탁했음은 물론이다. 당연히 버드의 연주는 신들린 듯했다. 도시는 그 연주를 듣고 나서는 파커가 쉬고 있던 분장실로 가서 악수를 청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정말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자네야
그는 자신의 색소폰
패들리스 셀마 Padless Selmer
를 선뜻 파커에게 준 것이다. 아직 몇 번 불지 않은, 새거나 진배없는 색소폰이었다. 그런데 돈이 몹시나 궁했던 파커는 바로 그다음날 반짝이던 그 색소폰을 전당포에 잡힐 도리밖에 없었다.뒤늦게 그 일을 알게 된 나는 전당포 문 앞까지 헐레벌떡 따라가, 제발 참으라며 거의 애원하다시피 했다. 정작 자기 색소폰은 종이와 테이프를 덕지덕지 처발라 둔 고철 덩어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기가 낡았다거나 새것이라는 따위의 문제는 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가 보다.
그 다음, 파커는 제이 맥샨 밴드에 입단하여 그와 함께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다. 맥샨의 말을 들어보자.
버드가 솔로를 연주할 때가 왔다. 그런데 당시 우리끼리는 다들 알고 있었던 일인데, 파커는 발에 상처가 나서 고생하고 있었다. 파커의 솔로 차례가 와서 앞으로 나가 연주할 때면, 신발을 벗어버린 양말 차림의 발이 관객들 앞에 훤히 그대로 다 노출되기 일쑤였다. 그들은 그 모양을 보고는 다들 숨이 끊어져라 웃어댔다. 유독 커다란 파커의 엄지발가락이 빠끔히 고개를 쳐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파커와 한 방을 썼던 지미 포리스트 Jimmy Forrest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때가 1940년쯤이었으니까, 15달러짜리 스포츠 셔츠라면 꽤 좋은
이제는 파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렸을 때부터 파커를 알게 된 후,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캘리포니아에서 같은 악사로 재회한 프랭크 모건의 증언이다.
찰리 파커가 다시 캘리포니아로 온 것은 그의 나이 서른한 살 때인 1951년의 일이다. 거기서 다시 만난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버드는 대단히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연주할 때는 내게 말을 걸어올 때도 있었다. 그것도 대개는 연주에 관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서둘지 말고, 천천히 take your time
나숨을 깊게 breath deeply]
또는리듬 파트에 기죽지 말고 don’t let the rhythm section scare you]
따위의 말이었다.버드와 함께 있을 때는 언제나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꼭 말하고 싶다. 나는 그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파티에서 파커가 핵물리학자들과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머리를 긁적대는 것이 아닌가!

▲ 찰리 파커.
그때 파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뭔가 좋은 이야기였음에는 틀림없다. 만일 파커가 색소폰이 아니라 자연에 대해 탐구할 기회를 가졌더라면, 어떤 인물이 됐을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갑부들만 모인 것 같은 파티였는데, 우리 악사들은 묵묵히 연주에만 열중했다. 그런데 버드가 갑자기 연주를 하다 말고 객석을 향해 소리치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정장은 벗고, 편하게 있는 게 어때요?
버드가 그렇게 제의하자, 다들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주섬주섬 그 갑갑한 정장을 벗기 시작했다.(웃음)
밥 라이즈너 Bob Reisner는 잼 세션이 있을 때마다 파트너는 항상 찰리 파커로 찍었다.
모든 것이 정말 술술 잘 풀려나가는 밤이었다. 손님들이 계속 몰려들었고, 파커의 연주는 그들을 자리에 꽉 붙들어두고 있었다. 아무도 춤출 생각을 않았다. 연주를 들으며 잔을 기울일 따름이었다.
막간 휴식 시간이 되었다. 버드는 웃음을 머금고 홀을 돌며 손님들과 악수를 주고받기도 하고, 나와 사업상의 문제도 이야기했다.
그때 갑자기 무대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하긴, 밴드가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약 15분가량 주크박스를 틀어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기타를 들고 있었고, 또 하나는 노래를 불렀다. 촌티가 물씬 풍기는 나그네 행색에다 야바위꾼처럼 지껄여대기도 했다.
객석 여기저기서 투덜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보다 못한 나는 무대로 갔다.
이 양반들. 잘하긴 하는데, 아직 무대에 설 만큼은 안 돼. 썩 나가,
그들은 나를 째려보았다.
이 사람, 지금 한참 열이 오르고 있는데 웬 찬물이야!
여기 매니저는 나야
내가 말했다.
찰리 파커가 우릴 고용했소, 이거
그들이 맞받았다.
아니, 그게 정말이야?
찰리한테 물어보쇼
나는 그 자리를 떴다. 버드는 저따위 얼치기 따위는 절대 쓰지 않을 것이다.
찰리, 설마 저자들을 고용하진 않았겠지?
아니, 내가 했어
찰리가 답했다.
지금 관객들이 난리야. 저 놈들을 내던져 버리겠어
그 사람들이 떠나면, 나도 여길 뜨겠네
라고 찰리가 말했을 때, 나는 질려버렸다.나는 버드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평소 그는 종교 음악이나 클래식 음악에 몰두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차에서는 항상 라디오를 틀어두고 유행가나 선술집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그런데 이번 것은 너무 저질이었다. 나는 골이 날 대로 나서 붉으락푸르락할 뿐이었다.
조금 있으니 파커가 내게 왔다. 그러고는 팔을 내 어깨에 걸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네, 보기보다 어리석구먼. 사업하는 법을 몰라. 지금 무대가 사람들로 터져나갈 것 같잖나? 이때 저렇게 엉망인 자들이 무대에서 설치면, 손님들 중 몇몇은 자리를 뜨지 않겠나? 이렇게 해서라도 숨 좀 쉬어보자고
파커는 짧은 삶을 마감하기 직전, 폐인이나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 기간 동안 그가 숨으로 들이켜고, 먹고, 마시고, 주사 바늘로 찔러 넣은 것은 오만가지 잡동사니였다. 엄청난 양의 흥분제와 환각제와 수면제와 최면제 등등, 당시 생각해 낼 수 있는 유해 약품이라는 유해 약품은 전부 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음이 막 덮쳐오려 하기 직전, 그는 뉴욕의 아파트에 있는 니카 Nica 백작 부인을 만나러 갔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파커가 사색이다 되어 자기를 찾아오자, 그녀는 우선 자기 주치의를 불렀다.
의사는 버드를 진찰하면서 몇 가지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술은요?
가끔 하지요
마치 거짓말하다 들킨 사람처럼 니카에게 눈을 껌뻑이고 난 뒤 이어진 찰리의 대답은 이러했다.저녁 식사 전에 셰리 sherry(독한 백포도주) 한 잔 정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