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기행, 그리고 예술혼 — 파커의 빛과 그림자
정작 우스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웹스터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악사들은 처음에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하더니만, 각각 그곳에 몰래 가서 확인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행여 누가 자기를 알아볼까 봐 전전긍긍, 눈치 살피기에만 바빴다는 것이다!
암스트롱과 명콤비를 이루었던 피아니스트 얼 하인스가 맥샨 밴드에서 탐냈던 사람은 우선 찰리 파커와 나머지 두 사람이었다.
「그 사람들을 내 팀으로 데려가도 되겠지?」드디어 하인스가 내심을 털어놓았다. 그리하여
〈협상〉
이 이루어졌다.「어디 앉아서 그 일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해 보는 게 어때? 그 사람들이 자네한테 얻어다 쓴 돈이 얼만가? 자네가 그 사람들을 놓아준다면, 대가는 중분히 지불하지」
듣고 있던 맥샨은 그 제의에 동의했다. 즉석에서
〈거래〉
가 이루어졌다. 그와 동시에 하인스는 한마디 했다.「그 동안 쭉 지켜봤네만, 나는 자네가 저 찰리 파커라는 사내를 잘 다루는 법을 모른다고 생각하네. 그 사람은 완전 어린애야. 이제 내가 데려가서 사내로 만들어 오지」
하인스는 자기 큰소리대로, 〈파커 어른 만들기〉
에 과연 성공했던가? 맥샨의 말을 들어 보자.
그 뒤 하인스를 만나니, 이런 말을 하더구먼.
「이 미친 작자를 어서 좀 데려가 주게나. 자, 이것 좀 보게. 그자가 돈을 빌리지 않은 단원이란 한 명도 없어. 동네 사람들 돈도 한 번씩 다 빌려 쓰지 않았는지 모르지. 또 갚는 데에는 왜 그리 굼벵이인지!」
파커가 일생 동안 두고두고 골치를 썩인 그 돈 문제의 출발점은 열일곱 살 이래 헤로인에 빠져들게 되고부터였다. 다른 마약 중독자들보다 활동적이기는 했으나, 시간 개념이 엉망으로 무너져 갔다는 점이 사회 생활에 가장 큰 말썽이었다. 연주 시간 어기는 일이 점점 일상화되어 갔다.
중독에 점점 깊이 빠져들면서부터 파커는 클럽 주인이나 동료 뮤지션들과의 약속보다는 마약 거래선을 확보해 나가는 일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 스타급 솔로이스트로서 각광받게 되면서부터는 적지 않은 돈을 만지게 됐으나, 결국에는 마약에 탕진했을 뿐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 무렵, 파커는 주삿바늘 자국이 무수히 나 있는 자신의 한 팔뚝 안쪽을 친구에게 보여주면서 침통하게 말했다.「이건 내 자가용 캐딜락이지」이어 다른 쪽 팔뚝까지 꺼내 보였다.「이건 내 집이고 ……」
파커가 얼 하인스 악단에 적을 두고 있을 때, 그 행색은 어떠했나? 빌리 엑스타인 Billy Eckstine의 추억이다.
당시 파커가 출연 약속을 제대로 지켰던 경우란 내가 장담컨대, 거의 없다. 그중 절반가량은 아예 모습조차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그럴 때는 대개 어디 처박혀 앉은 채로 자고 있기 일쑤였다.
약속을 해놓고도 공연 시간에 닿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가자, 얼은 벌금을 매겼다. 아주 가혹할 정도로. 그 벌금형은 조금의 에누리도 없이 자꾸만 반복되어 갔다. 버드는 툭하면 공연에 빠졌고, 그러면 얼은 또 벌금을 매기고 …….
우리가 디트로이트의 패라다이스 극장 Paradise Theater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버드는 다짐하듯 이렇게 말했다.「앞으로는 공연 시간을 꼭 지킬 거야. 아예 극장에서 자기로 했지」
우리는 그 말을 듣고는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른다.「그래, 좋았어. 그게 네 생활이야. 우리, 열심히 쇼를 해나가자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우리는 다시 일 준비로 모두 바빴다. 그런데 파커는 보이지 않았다. 늘 그래왔듯. 우리는 생각했다.
〈쇼 시간에 대겠다고 말은 해놓고 또 어긴 거지……〉
.어쨌든 쇼는 끝나고 막이 내렸다. 우리 단원들 모두가 각자 자기 짐을 챙기고 떠나려는 그 순간,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은 무대 스탠드 밑이었다. 버드가 바로 거기에서 자고 있는 것 아닌가! 공연이 진행되고 있던 내내, 그는 바로 그 밑에서 그 꼴로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은 눈곱만큼의 거짓말도 없는 사실이다.
파커만이 제대로 잘할 수 있었던 특유의 음악적 장기가 몇 개 있었다. 그중 제일 먼저 손꼽히는 특기는 여러 다양한 음악 장르들로부터 필요한 테마를 뽑아 그것들을 예술적으로 엮어, 하나의 훌륭한 선율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원래의 주제 선율 위에 자신의 상상력을 곁들여 빚어낸 그 변주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똑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그의 변주는 매번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인용하는 선율을 공연 때마다 번번이 바꾸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스트라빈스키 Stravinsky를 열심히 듣다가 다음날은 만토바니 Mantovani, 보 디들리 Bo Diddley, 아니면 기 롬바르드 Guy Lombardo 또는 TV 광고 음악이나 그가 생활하면서 그때그때 듣는 잡다한 음악……, 이런 식이었다.
파커가 평소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당시의 동료 아이드리스 설리번 Idrees Sulieman의 말을 들어 보자.
그때, 우리 집 단골손님은 케니 드루 Kenny Drew였다. 드루는 마치 한 집식구처럼 아무 때고 와서는 레코드를 열심히 들었고, 그러면 아내와 나는 그걸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잠자러 가는 식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집 단골로는 드루 말고도 디지와 버드가 또 있었다. 그들은 보통 새벽 한시나 두시에 들이닥쳤다.
내게는 특히 스트라빈스키 Stravinsky의 레코드가 많았는데, 나는 버드가 우리 집에 오는 것을 내심 껄끄럽게 여겼다. 왜냐하면 파커는 스트라빈스키를 유독 좋아하여, 한번 그걸 틀어놓는 날에는 아예 꿈쩍거릴 생각조차 않고 꾹 눌러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 사정 같은 것은 버드의 관심 밖이었다. 내가 눈치를 주면, 파커는 이렇게 말하기 일쑤였다.「나, 여기 있을래」그런데 신기한 것은 파커가 그렇게 그냥 건성으로 얼핏 한번 듣고 치운 것 같던 멜로디가 다음 잼 세션 때는 그의 색소폰에서 꼭 나온다는 일이었다.
하루는 마일스와 내가 클라리넷 교본을 펼쳐놓고는 끙끙대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 버드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얼마 뒤, 공연 시간이 되어 우리는 그 자리를 떴다. 그런데 이것 봐라, 아까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던 버드가 그 골치 아픈 선율을 훌륭하게 연주하고 있는 것 아닌가!
며칠 뒤, 스몰츠 파라다이스 Small’s Paradise라는 클럽에서 잼 세션 할 때의 일이다. 거기 있던 테너 색소폰 주자는 악기를 새로 산 지 며칠 되지 않은 상태였다. 연주에 들어가려는 자세만 잡아놓고는 그냥 뻣뻣이 서 있기만 했다. 딱 한 소절을 연주하더니, 잠잠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그게 다였기 때문이다. 몸을 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버드는 마치 들리지 않는 연주를 경청하고 있기라도 하는 듯, 앉은 자세를 조금도 흩뜨리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파커에게 말했다.「자, 버드. 나가서 뭔가 보여줘」
찰리 파커
그러자 버드는 말했다.「저 사람이 이제 곧 하려는 음악을 나는 다 들었으니, 됐어」
바로 다음이 파커의 차례였다. 무대에 올라간 파커는 그자가 하려다 그만둔 선율을 연주했다. 실로 완벽하게!
파커는 기억력이 비상한 사람이었다. 얼 하인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을 앞서가도 한참 앞서가는 사람이었다. 찰리 이야기라면, 이 일이 맨 먼저 생각난다.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무척 까다로운 편곡 작품이 있었다. 몇 번이고 해봤으나 도통 되질 않아, 결국에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구석에 처박아 두고 말았다.
그런데 그날 밤에 연주하기로 된 작품이 바로 그 곡이었다. 그동안 다들 끙끙댄 덕택에 그 곡의 분위기 정도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찰리는 생판 처음 보는 곡이었다. 그런데 찰리는 연습도 제대로 않았으면서도 자기 테너 색소폰을 끌어안고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내가 참다못해 말했다.「야, 찰리, 어느 세월에 저 곡을 연습할 거야?」
그러자 그가 답했다.「내가 다 알고 있는 곡이야」
「아니, 저 새 곡 말이야」
「안다니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찰리는 그 사이 그 골치 아픈 작품을 통째로 다 익혀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거꾸로!
하인스에게 편곡을 전담으로 맡아 해주었던 클리프 스몰츠 CliffSmalls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찰리의 전공 분야는 알토 색소폰이었지만, 밴드와 함께 연주할 때는 언제나 테너 색소폰을 불었다. 그러나 알토 스타일이 굳어져 버려, 테너 소리가 알토처럼 들렸다.
그런데 찰리는 앉을 때는 언제나 자기 책을 깔고 그 위에 앉는 것이 버릇이었다. 동료 악사들 모두는 악보집을 분주히 꺼내 그걸 보고 연주하고 있을 때, 찰리는 책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다 외우고 있었으니까!
새 곡을 받으면, 길어야 이틀 밤 정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넘기면, 절대 다시 그 악보를 보지 않았다.
뉴욕 아폴로 극장 Apollo Theater 전속 악단에서 파커와 함께 일한 에디 베어필드의 회상이다.
나는 제1테너를, 버드는 제3색소폰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마술쇼를 하는 남자가 대단히 빠른 속도의 음악을 배경 음악으로 깔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빠르기여서, 그쪽의 제1테너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마침 버드가 옆에서 헤매는 꼴을 보고 있다가 그 사람한테 이렇게 말했다.「어디, 그 소절을 나한테 두 번만 연주해 줘요」
그 사람은 느릿느릿 한 빠르기로 그렇게 해주었다. 그러자 파커는 그걸 곧 따라 하더니, 그 주(週) 내내 그 곡을 연습해 댔다. 그런데 파커의 연주는 횟수를 더해 감에 따라 점점 더 가속이 붙어 나갔을 뿐 아니라, 매번 할 때마다 변주 또한 점점 더 복잡해져 갔다.
그것은 엄청난 고난도의 색소폰 서커스 같았다. 파커는 정말이지 대단한 뮤지션이었다.
프랭크 소콜로 Frank Socolow 가 페이머스 도어 Famous Door에서 테너를 맡고 있을 때의 일이다. 마침 버드가 거기에 왔다.
당시 그는 자주 거기에 들러 내 테너 색소폰을 쥐고는 연주에 끼어들곤 했다. 정말 아름다운 소리였다. 몇 소절 멋지게 연주한 뒤, 원래 자기 파트인 알토로 돌아갔다.
파커가 52번가의 오닉스 클럽 Onyx Club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다음은 사디크 하킴의 기억이다.
버드는 항상 지각생을 면치 못했다. 그곳 주인 마이크 웨스턴Mike Weston은 버드가 허둥지둥 나타나면 얼굴을 잔뜩 찌푸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버드가 제자리에 들어가서 몇 소절 연주하면, 금세 얼굴이 환히 펴졌다.
그런데 하루는 늦어도 너무 늦게 나타난 적이 있다. 그때 테너를 맡고 있는 벤 웹스터는 바에서 목을 축이고 있었고, 나머지 우리 셋은 트리오 연주를 하고 있었다.
버드는 클럽에 들어서서 벤의 테너 색소폰을 집어 들더니, 「체로키! Cherokee!」라고 연주할 곡목을 알려주었다. 는 평소대로 연주해 나갔을 뿐인데, 그의 연주를 처음 접한 벤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여기 더블로 더!」벤은 바텐더에게 그 말만 계속할 뿐이었다.
여기서 꼭 밝혀두고 싶은 것은 웹스터의 테너 색소폰은 보통 것보다 구조가 특이해서, 아무도 잘 다룰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당대 일류급 테너 주자들, 즉 프레즈Prez(레스터 영 Lester Young의 애칭), 버디 테이트 Buddy Tate, 아이크 퀘벡 Ike Quebec 같은 사람들도 웹스터의 색소폰에 달려들어 봤지만, 허사였다는 사실을 이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아 알고 있었던 터였다.
이어 시카고에서 하킴은 더 인상 깊은 일을 목격하게 된다.
〈비밥〉
이라는 새 음악을 창조해 나갈 당시, 그 배경이었던 1940년대 뉴욕은 음악사적으로도 대단히 흥미진진한 풍경들을 간직하고 있다. 다음은 디지 길레스피의 기억이다.
지금도 비슷한 사정이지만, 당시는 전시(戰時)라 아파트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런데, 우리 부부에게 꽤나 그럴싸한 데가 눈에 띄었다. 집에서 연습하면 이웃들이 시끄럽다고 난리 칠 것이 뻔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연습은 스튜디오에서 다 하고 밤에는 집에서 꾹 참고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세시에 현관벨이 마구 울리는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버드가 자기 색소폰을 들고 서 있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