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늘로 날으는 거 같어

©김지곤
재즈 혹은 재즈적인 것은 이 땅에서 시쳇말로 트렌드의 하나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미상불 자본은 재즈를 편의적으로 이미지화, 교환 가치를 극대화하는 작업에 동원해 왔다. 재즈가 대중 예술임을 인정하는 한, 재즈가 기꺼이 떠안아야 할 운명의 영역임에는 틀림없다. 재즈의 이름으로 무수히 생산되는 파생 상품을 에워싼 오해 역시 재즈 진영이 감내해야 할 몫이다. 그를 두고 대세라 하자.
그러나 그 같은 타성적 소비 관행을 거스르듯, 그의 색소폰은 급진적으로 나아가 배타적으로 재즈의 이상을 구현하고 있다. 우리의 문제 의식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 비타협성은 그의 색소폰이 악기가 아니라 차라리 잘 벼려진 검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다. “재즈 뮤지션의 이상은 자기만의 소리를 갖는 것”(요아힘 베렌트, ‘The Jazz Book’ 중)
저 화두를 충족시키고도 남는 지점에 위치하는 어떤 개성적 음 현상이, 곧 재즈다. 이 점, 재즈맨의 이상은 오케스트라가 추구하는 바의 대극에 있다. 바로 옆 주자와 가능한 한 동일한 소리를 일사분란하게 내는 게 제 1 바이올린 주자들의 목표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는 자명해진다.
그는 역사적 - 공간적 한계를 갖는 프리 재즈라는 카테고리를 넘어, 재즈는 프리 뮤직이라며 자신의 작품에 ‘FM(Free Music)’이라는 말을 달고 나름의 일련 번호를 매겨갔다. 서구적 프리 재즈의 한계를 뛰어넘는, 명백히 자기 선언적인 정의다. “평론가가 설명한다면 이미 그 음악은 포퓰러 해졌다는 증거”라는 그의 진술은 도전적이기까지 하다. 평론 혹은 언론 진영으로부터의 찬사, 아니 관심을 어떻게든 얻으려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더군다나 그들은 ‘소통’이라는 그럴싸한 명분까지 두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것은 소통을 거부하기라도 한 것이었을까?
이 글은 강태환과 그의 재즈를 문자라는 틀 속에 고정시켜 보려는 덧없는 반동의 소산이다. 영구 전위를 외치는 그의 재즈를 문자라는 낡아빠진 탈것으로 가로질러 보려 하는 소이라 해도 좋다. 그렇지는 않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쓰는 이가 강태환의 재즈라는 현상을 인간적 호기심의 차원이 아니라 미학적 범주 내의 사건으로 소환한 거의 첫 시도를 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일본이나 유럽측의 접근을 제외한다면). 말미에 첨부된 바, 몸 담았던 신문사에 실었던 기사문 몇 건이 알량하나마 증거가 되길 바래 본다.
정보 부대, 서사 부대, 서정 부대가 싸웠다. 다시 말해 그를 한국 사회의 범속성에서 비껴난 컬트적 현상으로 볼 것인가,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보면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자의 심리적논리적 궤적을 따라갈 것인가의 선택에 대한 문제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형태적으로는 1문 1답의 인터뷰 기사에서 기자의 질문 대목을 빼고 재구성을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진술만을 따로 모으면서, 최대한 원형을 보존하려 애쓰면서, 저자는 사실들 간의 인력과 척력을 느꼈다. 긴 말을 하는 일에 익숙지 않은, 아니 그런 류의 커뮤니케이션이 아예 필요치 않은 형태의 삶을 살아온 그로서는 마치 짐을 풀어 헤치듯 사실들을 던졌다. 필자는 말하자면 조정자로서, 보다 유려한 전달을 위하여 재배치 또한 시도했음을 밝혀 둔다.
그에게 다가서는 경로, 즉 서술의 입지점은 사실 한두 가지 정도로는 부족할 수도 있다. 일반인에게는 마치 묘기 대행진으로 비칠 수도 있을 초절 기교에 초점 맞출 수도, 남다른 행로를 택한 그의 인생에 초점 맞출 수도 있었다. 뒤잇는 글뭉치는 이를테면 그 절충점 어디쯤 위치한다.
현장감이 생생한 ‘더 트리오’의 사진들은 후배 작가 김지곤 씨의 작품이다. 시간을 쪼개 귀한 이미지들을 만들어 준 그에게 감사한다.“서술의 관건은 (객관적 정보보다도)취향”이라며 실제적인, 그러나 다소 위험해 보이는 조언하신 고희경 홍익대학교 영상대학원 교수의 말씀은 하나의 큰 심상으로 다가 왔다.
생활을 위해 공사 현장 노동(이른바 ‘노가다’)을 하다 왼손의 네 번째 손가락이 잘린 강씨의 동료, 타악 주자 박재천씨의 증언이 없었다면 책은 한낱 공염불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말에서, 세상의 고정 관념과 몰이해란 얼마나 완강한가를 한번 느껴보시라. 또 그 같은 기대를 배반해 가는 강씨의 대응 역시.
밤샘 연습 도중, 그는 이렇게 말할 때가 있다. “이쯤에서 끝냅시다.”그 말이 그 날의 연습을 끝내자는 말로 들리기 보다, 이 소통 부재의 몸짓을 그만 하자는 말로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강태환은 한국 재즈의 불가사의”라는 명제는 여전히 불온한 진실이다. 그는 역사가 연속적으로 발전한다는 믿음을 일거에 전복시켰다. 평상시는 극히 범상하다. 자신이 세계적 프리 재즈 뮤지션이라는 사실을 오히려 숨긴다. 두 사실의 괴리는 우리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다가도, 황홀케 한다.
이 글의 제목은 연습—이라기보다 화두를 붙드는 작업이라는 묘사가 더 적절할—을 끝낸 그가 아주 종종 혼잣말처럼 뇌까렸다는 말버릇에서 떠왔다. 이 어설픈 글 뭉치가 하나의 등걸이라도 될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