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예외, 강태환

즉흥이란 일체 언어가 배제된다. 불가피하게 언어가 개입하는 국내 뮤지션들과의 작업보다 음악적ㆍ미학적 본질만 갖고 격돌하는 즉흥 협연을 나는 선호했다.

In a nutshell

    찬란한 예외
      Listen

찬란한 예외

kangtaewhan_banner_2.png

©김지곤

상식적으로, 재즈는 자유의 언어를 지향한다. 거기에 ‘프리(free)’라는 말을 덧붙이다니 동의어 반복인 듯도 싶다. 문제는 재즈가 결국 대중 음악이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즉 대중 연예 산업에 복속되는 재즈는 시류에 민감한, 패턴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유행 음악인 것이다. 그러나 재능 있는 연주자라면 자발성 혹은 즉흥성에의 유혹을 떨칠 수 없다. 재즈가 운명적으로 팝(pop)이 되지 못하는 이유다.

악보에 적힌 대로만 연주해야 마땅한 것으로 여겨지는 클래식조차도 연주자에 따라 얼마든 즉흥적으로 연주했다. 물론 주어진 화성 체계 내에서였지만. 적어도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모든 장르에서 테마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즉흥 연주는 당연한 관행이었다. 클래식이 그러할진대 재즈야 오죽할까.

그 극한점이 역사적으로 1960년대에 본격 태동한 프리 재즈다. 쇤베르크 등이 클래식에서 추구했던 12음 기법 등 무조(無調)주의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기존의 화성 체계가 파괴된 ‘자유 조성(free tonality)’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와 함께 인도, 아프리카, 아랍, 일본 등 이전의 재즈가 미처 눈을 돌리지 못 했던 지역의 음악적 어법까지 끌어안게 되었다. 비슷한 이치로 음악의 재료로서 소음(noise)까지 포용했다.

그것은 예술 소비의 관행을 뒤집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음악은 청중을 좇아 가는 상품이기를 거부한 것이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얻겠다”는 음악, 그것이 프리 재즈다. 애초에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미국 사회 내에서 흑인의 부당한 차별에 대한 항의—에 따라 분노, 증오, 저항의 색채가 짙었다. 그러나 재즈에는 어느 특정 노선을 거부하는 강렬한 본능이 있다.

1960년대 뉴욕에는 재즈 뮤지션이 추구했던 강렬한 저항의 음악과 더불어 별도의 움직임이 병행했다. 종교적 열정—물론 서구의 기독교는 아닌—에 따라 마치 신에의 찬미를 방불케 한 존 콜트레인의 거룩한 재즈, 흥겨운 민속 음악적 요소를 도입한 앨버트 아일러, 지성적인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쓴 폴 블레이, 황당하면서도 우주적 감동을 추구한 선 라 등의 특출한 재즈맨들은 프리 재즈의 이름으로 재즈에 일대 변혁을 추구한 사람들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제멋대로인 듯한 프리 재즈의 진정한 가치를 처음 알아본 것이 클래식의 전위인 무조주의 음악이었다는 점이다.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 등 유럽과 미국의 기성 클래식 언어를 일거에 뒤집은 무조주의 음악 덕에 프리 재즈는 유럽 쪽으로 건너가 진지한 예술로 대접받았다. 유럽 음악가들이 치밀한 계산으로 만들어낸 파괴의 음악은, 결국 가방끈 짧은 흑인들의 재즈와 미학적으로 등가물이었던 것이다. 대중 음악의 범주에 속하되 그 관행을 거부하는 음악, 바로 그것이 프리(free) 재즈다.

눈을 안으로 돌리자. 한국 땅에 엄존하는 일련의 프리 재즈 뮤지션들이 있음이다. 일부의 열렬한 지지, 대다수의 냉담한 무관심은 그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다. 주목되는 것은, 젊은 우리 재즈 뮤지션을 중심으로 해 일고 있는 프리 재즈의 움직임이다.

이제 그들 중 몇몇을 소개하려 한다. 음악 비즈니스에 연루되지 않은 그들을 세상은 부재하는 사람들로 치부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세상은 넓고 즐길 것은 넘쳐나니까. 당연히 혹은 다행스럽게도 한국에서 그들은 실존재한다.

집 안에 조그마하게 마련해 둔 연습실에서 매일 그날치의 연습을 거르는 법이 없는 이 알토 색소폰 주자의 일상은 나날이 한 치의 오차도 없었던 철학자 칸트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사실, 바로 위의 진술은 강태환을 둘러싼 수많은 오해 혹은 무책임한 신화 만들기의 연장선일 뿐이다. 재즈를 위해, 나아가서는 전위 예술을 위해 그 같은 접근법이란 야멸차게 말해 하나의 모래성 쌓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일단 위키백과를 보자. “강태환은 대한민국의 프리 재즈 음악인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클라리넷을 시작해 그 후 색소폰을 연주하였다. 1968년에 국내에서 최연소로 재즈 밴드의 리더가 되었다. 1978년 타악주자 김대환과 트럼페터 최선배와 함께 대한민국 최초의 프리 재즈 그룹인 강태환 트리오를 결성하였다.” 동해안 별신굿 예능 보유자 김석출 등 특별한 사람들과의 음악적 인연이 누락되어 있지만 객관적 미덕은 살아 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를 가까이서 취재할 복을 누린 기자로서는 또 하나의 팩트로, 가까이 활동한 몇몇 재즈 뮤지션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 재즈의 소중한 자산인 그들을 소개하기 앞서, 하나의 내재적 필연으로서 강태환이란 관문을 통과하자. 운 좋게도, 그로부터 직접 청취한 것이 있으니…. (이하 강태환의 육성으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외국 사람들이 나를 더 잘 아는 듯하다. 국내 공연 때는 관객이 많아야 20~30명인데 물 밖으로 가면 그보다 적어도 두세 배는 늘어나니.

즉흥이란 일체 언어가 배제된다. 불가피하게 언어가 개입하는 국내 뮤지션들과의 작업보다 음악적ㆍ미학적 본질만 갖고 격돌하는 즉흥 협연을 나는 선호한다. 외국 재즈 뮤지션들과의 협연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세 사람이 있다. 그들에 대한, 나의 인상 비평이라 해도 좋다.

색소폰 주자 에반 파커(Evan Parker).

Evan_Parker.jpg

에반 파커, by Nomo michael hoefner

20여 년 동안 협연해 온 그는 이미 30대부터 대단한 기량에 도달한 유명인이었다. 굉장히 짧고도 빠른, 격렬한 스타카토가 경이롭다. 사이사이에 음정도 구사, 마치 두 사람의 연주처럼 들린다. 그의 연주는 남들과는 다른 구강 구조가 전제됐을 때에만 가능한 테크닉인데, EP(에반 파커)라는 약호가 달려 있을 정도다.

평소 이미지는 편안하고 조용한 점잖은 이 영국 신사는 마침 나와 동갑이다. 경제적 여유만 된다면 초청해 솔로 무대를 펼쳐 주고 싶다. 나처럼 그 사람도 핸드폰, 이메일은 안 한다. 부득이 연락할 일은 여자 친구의 e메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네드 로텐베르크(Ned Rothenberg).

Ned_Rothenberg.jpg

네드 로텐베르크, by Marek Lazarski

파커 다음으로 쳐주는 사람이다. 일본 순회 공연 때 만났는데, 그의 제의로 일본과 서울서 듀엣 무대를 가졌다. 색소폰은 물론 베이스 클라리넷, 일본 고유의 피리인 사쿠하치까지 능숙히 구사하는 재주꾼이다.

인간적으로는 귀엽고, 때로는 동생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래서 오히려 불편하다. 왜? 대결의 불꽃이 튀기는 진짜 음악은 그런 사람과는 힘들다. 자꾸 배려하게 되니까. 음악에서는 젠틀맨이란 필요 없다. 작품을 버리는 것은 물론, 관객들도 재미가 없으니까.

피아니스트 사토 마사히코(佐藤允彦).

kangtaewhan2_3.png

사토 마사히코

스탠더드에서 프리 재즈 작품까지 오케스트라로 편곡해 낼 만큼 음악적 용량이 방대하다. “즉흥 연주에서는 배려, 동조, 대화하는 부분 외에도 ‘반격’하는 묘미가 중요하다”며 매우 논리적 이론을 펼쳤는데, 나한테 중요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

공식적으로는 나의 선생’이지만 사석에서는 “마사히코 형”이다. 타악 주자 미도리와 함께 ‘동그라미 트리오’를 만들어 소련, 동남아, 일본을 돌아다니며 콘서트를 가졌다. 일본의 최상급 클럽인 핏 인(Pit In) 공연 때는 2주 내내 모두 13회 펼쳤는데, 매 공연마다 멤버를 바꿔가는 방식이었다. 솔로 콘서트 요청도 받아 들이면서 일본 80여 도시서 공연했다. 당시 일본의 진보적 재즈 마니아들에게는 “강태환이 이번에는 어떤 사람과 즉흥 협연으로, 또 다른 색을 낼까”가 아주 큰 관심사였다.

사토의 타이밍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절정으로 치닫게 하고 환기시키다, 느닷없이 공격 들어와. 상대의 음악을 미리 간파하고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식이다. 가끔 한국에 와서 한국의 재능 있는 뮤지션과 즉흥 협연을 펼치기도 했는데, 즉흥 연주자로서의 기량을 반의반도 펼치지 않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이를테면 반주만 하다 간 형국이었던 것이다.”

세계적이라는 수식어를 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할지라도 일반에게 그들은 ‘먼 그대’일 뿐이다. 갈수록 강고해지는 예술계의 스타 시스템 탓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프리 재즈의 운명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저들은 컬트(cult)라는 가치를 전형적으로 구현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재즈가 살아 있는 한 프리 재즈는 어디선가 계속 가뭇없는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태초에 강태환이 있었다. 이제 수많은 ‘강태환들’이 그 신화를 이어 집필 중이다. 클래식 산업도, 엔터테인먼트 진영도 포섭해 낼 수 없는 그들 덕에 우리 문화는 촘촘한 결을 얻게 되리라. “강태환은 한국 재즈의 불가사의”라는 명제는 여전히 진실이다. 지금도 인터넷 공간에서 그는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그는 역사가 연속적으로 발전한다는 믿음을 전복시켰다. 평상시는 극히 범상하다. 자신이 세계적 프리 재즈 뮤지션이라는 사실을 오히려 숨긴다. 두 사실의 괴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다가도, 황홀케도 한다.

자, 이제 그와 맞닥뜨릴 시간이다.

Listen

Subscribe

Jazzaje의 정원에서 최신 글과 업데이트를 받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