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환 — 날아 오르다

재즈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체득한 내가 궁극적으로 도달한 곳이 내가 서두에서 말했던 ‘진짜 음악(real music)’이다.

In a nutshell

    날아 오르다

날아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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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곤

그가 대담의 장소로 얼른 제의했던 곳은 자택 인근의 지하철역 커피숍이었다. 사람들의 번다한 출입이 끊이지 않는 지하철역 다방은 사실 그런 논의의 자리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는 사실은 나가서야 알게 됐다. 내 의도는 배반당했던 것일까?

진지한 대담이 오가기에는 황당하리만치 넓은 곳이었다. 게다가 거의 만원. 악을 쓰듯 사람들은 대화하고 있었고, 그 같은 현장 상황에 다소간 긴장한 나는 그의 말을 수첩에 빼곡히 옮겨 갔다. 데모 현장이 아니고서야 생각하기 힘든 취재 여건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는 대담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을 만큼 내 인식망을 비껴갔다. 장터의 소음 뺨치는 곳에서 고도의 음악적 담론이 천연덕스레 펼쳐진 것이다. 그랬을까? 우리는 도(道)라도 수수(授受)하고 있었던 것일까? 핸드폰도 없고 이메일도 안 한다는 이 ‘자발적 문명 지체인’의 프리 재즈, 아니 프리 뮤직 이야기 속으로 나는 흡인되어 갔다.

글은 철저히 1인칭 시점을 따랐다. 짧지 않은 기자로서의 시간이 준 경험에 의하면 글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그렇게 될 때 가장 진솔해질 수 있다는 걸 안다(정밀한 취재가 전제돼 있다면). 대학 시절, 수업 텍스트로 빨려들 듯 읽은 포크너의 소설 ‘분노와 음향’에서 구사된 1인칭 시점 서술에서 느꼈던 강렬함의 기억 때문이기도 했다. 여하튼 그는 이렇게 길을 떴는데…


외딴 데 처박혀 새로운 음악을 찾아 두문불출한다는 말까지는 않겠지만 나는 웬만한 연락을 끊고 산다. 어쩌다 사람들을 보면 연락하지 말라고 말하고 다닌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재즈에서 관용화된 말인 ‘우드셰딩(wood shedding)’을 얼핏 떠올렸다. 1996년에 냈던 책 ‘재즈 재즈’의 후기에서는 그 말 뜻을 이렇게 옮겼다. ‘재즈 뮤지션이 새로운 음악을 탐구하기 위해 깊은 숲 속 통나무집처럼 세상과 격리된 데 처박혀 연구에만 몰두하는, 재즈 특유의 관습을 가리키는 말.’ 그리고는 거기에 맞는 역어로 ‘용맹 정진’이라는 불교 용어를 번역어로 갖다 붙였으니, 좀 견강부회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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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내 세계를 정리할 때가 됐다는, 내면이 내는 소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깥일보다 즉흥 작업이 그보다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여태껏의 음악적 표현을 정리하고 가다듬을 때가 된 것이다.

요즘 음악적으로 몰두하는 작업도 내 표현 중 얕은 부분, 바람직하지 않은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다.(이에 관한 그의 의지는 예상외로 강했다) 듣기 편하게, 대중을 의식하며 하기 싫어하면서도 한 부분, 즉 멜로디 같은 것들은 다 잘라내겠다. 필요 이상의 감상을 요구하는 도시적 감성은, 들어달라 강요하는 것은 다 잘라내겠다.(평소의 어투와 대비시킨다면 그것은 거의 ‘척결’의 수준이었다. 이어진 그의 말은 이렇다.) 내 음악이 어렵다, 모호하다고 하는 것은 선입견 때문이다.

나는 포퓰러 뮤지션이다. 역사적으로 크게 보아 전위적 표현은 이후 세대에 들어서는 포퓰러해진다.(그는 ‘동시대성’에 대해 특별한 정의를 요구한 셈이다) 나의 음악은 당시의 느낌, 구체적으로는 내 행복감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연예인이 아니고 음악가다. 내가 연주하는 곡은 관객이 아니라 내가 좋아 쓰는 곡이다. 관객이 좋아하면 다행이다. 인기인이 안 되더라도 나름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 나를 행복하게 해야 한다.

사실 인기인에 대한 샘은 여전하다(‘샘’이라고, 그는 즉물적 표현을 마다 않았다). 그 유혹을 뿌리치고 자제할 뿐이다. 다시 말해 내가 가야 할 중요한 길을 느끼며 부단히 인내하는 과정이다. 내 나이가 되면 사람은 근본을 생각한다. 음악도, 인생도. 현실보다는 이상을 우위에 두는 시기다.

(그는 한참 동안 과거를 불러 모았다. 그에 의해 부려진 과거의 정보는 물론 선후 관계를 명확히 해보려는 나에 의해 수시로 간섭 받았다. 그를 가리켜 기자적 본능이라 해도 그리 어긋난 말은 아닐 것이다. 절대 추상으로 오기까지의 경로가, 얼추 얼개를 드러낸 데 그 같은 개입은 분명 일조했다고 본다.)

9살부터 클라리넷을 공부했던 나는 인천신흥국민학교 4학년 때 밴드부에 들어갔다. 꾸준히 클라리넷을 연습한 덕에 서울예고 실기 특채에 합격해 클래식 클라리넷을 전공하게 됐다. 그렇게 15년간 클라리넷 수업 끝에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연주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알토 색소폰은 예고 2년 자퇴한 후 만난 악기다. 연주자를 옭아매는 클래식은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 18세였고 학교를 떠났다. 그렇게 정규 음악 공부를 접은 나에게 자연스럽게 다가 온 것이 미 8군 빅밴드였다.

이후 수십여 단체 전전했는데, 그렇게 옮겨 다닌 것은 공부 욕심에 잘 한다는 선배를 찾아 다닌 결과다. 8군에서 스윙 댄스 반주용으로 나오던 악보는 나의 훌륭한 공부 거리였다. 즉흥(improvisation) 악보의 존재도 그렇게 알게 됐다.

당시 미8군 안에는 화양, 화양, 대영, 공영 등 실력 있는 단체 2~300여개가 연예인 공급 업체로서 미군 클럽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매니지먼트사들이 관리했다. 한 회사 안에 코미디, 음악, 마술 등 하던 쇼 단체가 1개씩 있었다. 나머지는 그 같은 매니지먼트 사 없이 밴드뿐인 대구, 동두천, 용주골 등지다. 바로 하우스 밴드들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 필자는 2003년 한국일보의 칼럼 ‘나의 이력서’ 연재 당시 신중현씨로부터 구술 받은 미 8군 내의 쇼 비즈니스 구조를 옮겨두고자 한다. 당시 나는 한국 재즈 초창기의 풍경은 그 곳에 온존되어 있다고 믿고 굳이 한 회 분량을 할애했다. 그에 대한 생생한(물론 필자에게) 기록으로 그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믿음은 여전하다.)

신중현씨는 우선 그 곳을 두고, 음악 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이라고 했다. ‘천국’에서 그가 예민한 감성으로 밤새 듣던 음악이 주로 재즈였다. 그는 찰리 파커, 존 콜트레인, 레이 브라운, 제니 캐슬 등을 “나의 영웅”이라고 불렀다. 그대로 옮겨 본다.

“미군들이 재즈를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재즈가 미국 음악의 기본이라는 믿음에서 나는 듣고 또 들었다. 아마 미쳐 있었던가 보다.

“Can you have a jam session with me?” 클럽에서 혼자 연주하고 있는 뮤지션들을 보면 나는 다가가 그렇게 물었다. 모두들 쾌히 응했다. 그야말로 즉흥적이었다. 당시 일반 대중은 물론, 음악깨나 하는 사람들도 흑인들의 블루스가 뭔지 몰랐던 때였다. 그러나 나는 흑인 재즈 특유의 즉흥에 매료돼 그 후 10년은 거기에 미쳐 있었다.

백인 재즈도 들었지만 인위적이고 기계적이어서 금방 싫증났다. 재즈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체득한 내가 궁극적으로 도달한 곳이 내가 서두에서 말했던 ‘진짜 음악(real music)’이다.

당시 대중에게는 ‘비 나리는 호남선’, ‘신라의 달밤’ 같은 노래뿐이었다. 동창들과 만나면 기타 반주는 쳐줬지만 절대 부르지는 않았다. 그 때 큰 인기를 끌었던 명국환의 ‘방랑 시인 김삿갓’이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 노래여서 씁쓸했던 기억도 있다. 재즈에 미쳐 있을 때는 길을 가다 트로트가 나오면 귀를 막고 가기도 했다. 행여 귀를 버릴까봐.” (지금 다시 보니 재즈에 대한, 거의 절대적 경외마저도 느껴지는 대목이다.)

당시 나는 스윙, 딕시랜드를 비롯해 비밥의 기초까지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보다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폴 모리아, 빌리 본, 벤처스 악단 등을 흉내 내는 수준이었다. 서울의 쇼 단체 매니저(화양)가 그 무렵 하우스 밴드를 전전하던 나를 불렀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공연 등 특별한 일 있을 때만 뮤지션들을 부르던 화양의 급료 수준은 상당했다. 줄리어드 출신의 심사 위원들은 우리에게 수시로 클래식이나, 딕시랜드로 오디션을 실시했다. 심사 후 우리는 A~D 클래스로 분류됐는데 신중현, 이판근은 더블A였다.

당시 나는 정상급 악단 Cool Cats에서 3번 색소폰 주자였다. 풀 밴드에서 색소폰은 테너2, 알토2, 베이스1 등 5명이 필요했다. 풀 밴드는 최소한 13명에서 16~17명까지로 구성된 재즈 오케스트라다.

맨 앞줄에 제1 알토, 제2 알토, 제1 테너, 제2 테너, 제3 테너가 자리하면 바로 뒷줄에는 트럼펫(1대) - 트롬본(14대) - 베이스(12대)가, 그 뒤에 기타, 드럼, 베이스, 피아노가 자리 잡는 게 기본이었다. 각 악단들은 비밥, 스윙, 쿨, 솔(R&B) 등 각기 장기가 달랐는데 나는 5~6년 새 두루두루 다 거쳐 봤으니, 운 좋은 편이다.

당시 급여는 일선 공무원의 몇 배 수준이었다. 밖에서는 구경 힘든 고급 화장지 정도를 쉽게 썼을 정도니. 예를 들어 1970년대 색소폰 파트는 1,000불 받았는데, 우리 5명은 공평히 나눠 가졌다. 그러나 당시부터 미군 철수가 시작됐고, 그들에 종속돼 있던 수백 개 단체 역시 없어졌다. 음악인들은 뿔뿔이 이민 가거나 다른 직종으로 바꿨고, 음악 쪽으로 남은 사람들은 유흥 업소의 무대로 가야 했다. 나 역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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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호텔, 도쿄호텔, 백림호텔, 뉴코리아호텔, 로얄호텔 등 명동 근처의 호텔만 다녔다. 당시 호텔에 나가던 대표적 악단으로는 아리아호텔의 최상용 악단, 국제호텔의 길옥윤 악단, 무교동 미쓰살롱의 이정식 악단 등을 비롯해 김용세, 엄토미 악단 등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내가 리더로 있던 강태환 악단이었다.

우리에게 대한 대접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예를 들면 신중현 팀은 지하의 고고 클럽 무대에 섰고, 우리는 꼭대기의 나이트클럽에 출연했다. 당시 나이트클럽이란 호텔 주인이 문화 시설 운영하는 마음으로 운영하던, 일종의 고급 사교장이었다. 음악도 고급스러운 걸로 부탁했고 악사들에 대한 대우도 훌륭했다. 그들의 발언권이 컸던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임대 운영 방식으로 바뀌면서 상업화하기 시작했고 술장사로 변질했다. 분위기도 험악해져 갔다. 마침 30대로 접어들고 있던 내게 그 같은 모습은 대중 음악이란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뉴 코리아 호텔에서 활동하던 ‘강태환 악단’ 이야기를 더 해야겠다. 단원들의 평균 연령이 나보다 대체로 10살 많아 30대 중반은 넘었던 그들은 정상급 빅밴드였던 민들레 단원 아니면 방송 악단장의 실력자들이었다. 드러머가 심포니 출신일 정도였다. 그들은 솔로이스트로서의 욕심 없이 편곡 작업에 충실하던 나를 악단 대표로 맡겼으니, 요즘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내 복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착한데다 철딱서니 없고 귀여우니 내게 맡겼던 것이라 생각한다. 음악 밖에는 몰랐으니 선배들한테 점수를 많이 땄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비밥을 썩 잘 연주했다. 그러나 굳이 구분하자면, 별로 들을 기회가 없었던 찰리 파커류의 비밥은 아니었다. 내가 교육 받은 클래식을 바탕으로 한 재즈였다. 미국식 재즈와의 괴리가 그렇게 싹트고 있었던 걸까.

결국 미국 사람들이 돌아가고 많은 밴드 소속 악사들이 공황 상태에 빠졌지만, 캄보 밴드에 뜻을 두고 있었던 나는 별 충격 없이 잘 해나갔던 것이다. 그렇게 10여 년 단체 끌고 다녔는데 나만의 음악에 대한 욕구는 깊어 갔다.

돈?

큰 사업가였던 아버지의 셋째 아들이었던 나는 어려서 클라리넷을 불면서부터 대충 감지했다. 예술가는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화여대 약대 출신으로 대학 시절 만나 1968년 결혼한 아내에게는 생활인으로서 늘 미안하다. 결국 예술가는 기생할 수밖에 없다. 특히 대중 예술 아닌 순수 창작 예술은. 나는 아내 잘 만난, 참 운 좋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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