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환 — Free, 그 악착 같은 길이여

Free에서는 모든 의견 충돌이 허용된다. 아니, 오히려 그 편이 오히려 낫다. 충돌은 곧 음악으로 나온다.

In a nutshell

    Free, 그 악착 같은 길이여

Free, 그 악착 같은 길이여

강태환4_banner.png

©김지곤

첫 작곡이라 할 만한 것이 25살 때 나왔는데, 5~6명 편성의 비밥 같은 스타일이었다. LP ‘Korean Free Music’에 수록된 트리오 스타일의 뿌리라 할 수 있다. 그 무렵은 재즈, 퓨전, 아방가르드, 노이즈 뮤직 등 각종 양식에 대한 나름의 스타일 실험기였다. 의도적으로 라디오 주파수를 틀리게 맞춰놓고 연주하거나 스님의 염불을 배경으로 연주하기도 했던, 말하자면 의식적 프리 재즈였다. 업소 다닐 때는 손님 없는 초저녁 시간을 이용했다.

최초의 공식적 프리 재즈는 1978년 공간사랑에서 팀 이름 없이 6명 편성으로(베이스 함기호, 경희대교수 피아니스트 김동성 등) 1년 남짓 활동하던 때의 작품이다. 나는 작곡(오선지, 연주)과 연주를 담당했는데 내 의도를 멤버들에게 충분히 설명하려니 연습과 별도로 많이 만나야 했다.

얼마 안 돼 3명으로 압축됐다. 업소에서 만난 선배인 최선배(트럼펫), 김대환(타악), 나 해서 밴드 이름 없이 그냥 트리오로 활동하다, ‘강트리오’란 명칭을 얻게 됐다. 여러 단체 드나들던 두 사람은 음악에 대해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 자유분방한 형식의 재즈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인간적으로 극히 비교되는 두 사람이었다.

최선배는 술 입에 안 댔지만 담배를 피웠고, 김대환은 두주 불사하면서도 담배는 안 피웠다. 술과 담배라면 나는 약간씩 했다. 내가 형식적으로 리더가 된 것은 1985년 일본이 우리 팀을 초청할 때 서류에 구체적인 명칭을 적어야 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내 이름으로 나간 것이다.

우리의 악보는 원래 음표와 그림이 공존하다, 차츰 악보는 줄어들고 설명과 그림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음표로는 최소한의 멜로디만 짧게 표시했다. 그러다 폭발 지점은 별표로 나타내는 식이었다. 글씨의 크기를 달리해 음량을 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왜 세 사람인가? 우선 일본에서 그 같은 편성을 원했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장 큰 이유다. 우리로서는 오래 하다 보니 서로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음악 하는 사람, 특히 나름의 뜻이 있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음악 얘기뿐이다, 음악 속에서 행복 찾는 사람들이니까. 각자 연구하느라 딴 시간 낼 틈이 없었다고 해야 한다.

염불 소리를 배경으로 연주하기도 했던 공간사랑에서의 찬란한 실험기는 86년까지 8년간 계속됐다. 그곳은 마니아들끼리만 통하는 아우라로 충만해 있었다. 수십 번씩 우리 연주회를 보러 온 사람도 있었고, 우리 음악에 빠진 사람들끼리 결혼까지 하는 일도 따랐다.

강태환4.jpg

Free에서는 모든 의견 충돌이 허용된다. 아니, 오히려 그 편이 오히려 낫다. 충돌은 곧 음악으로 나온다. 이 음악은 규칙이 없는데 자꾸 규칙을 찾으려니 힘든 것이다. 규칙 있기 전의 음악이 바로 Free다.

공간사랑의 앙상블은 8년 76회까지 갔다. 이후 꾸준히 앙상블 작업을 못하고 외국(주로 일본) 활동기가 따른다.

일본의 젊은 음악인들과 밑바닥부터 하다 보니 고생 많았다. 나의 음악에 우호적이었던 평론가 소에지마 데루토 씨가 나서서 일거리를 많이 잡아 줬다. 당시 활동 중 작은 마을에서 가졌던 일련의 콘서트는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오뎅집, 이발소, 양조장에서도 하우스 콘서트를 가졌는데, 당시 공연 시간 때는 테이블 다 치웠다. 음식점이라 할지라도 공연 때는 소극장 분위기 나게 좌석 배치 같은 데 신경 썼다. 이런 공연 1년에 40여 개 치렀는데, 한국 음악인으로서는 그들의 깊은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독특한 경험을 한 셈이다.

당시는 일본의 프리 재즈 유행이 지난 때였다. 그러나 그들의 의표를 찌른 나의 전략은 적중했다. 나는 난해하고 시끄럽기 일쑤인 일본의 기존 프리 재즈와는 다른 것으로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공간사랑의 시간이 놀라운 성공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의 음악 상황을 북한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치부해 두고 있던 일본인 재즈 평론가들은 내 연주를 처음 접하고 이구동성으로 “한국에서 이런 음악 하는 사람 있는 줄 꿈에도 몰랐다”는 말을 쏟아 냈다. 그들이 받은 충격은 아사히 신문 문화면이 대변해 준다. 나름 재즈 역사가 깊다고 자부하고 있던 그들의 요지는 이것이었다. “일본은 아직도 일본 고유의 재즈를 만드는 데 고심하지만 한국은 이미 자기의 재즈를 해 왔다.”

존 존, 빌 라스웰, 프레드 프리스 등과 활동한 일본의 전위 재즈 트럼펫 주자 곤도 도시노리가 좋은 예일 것이다. 김덕수와 그는 1985년 또 다른 ‘강트리오’를 결성하여 1년간 도쿄, 오사카, 서울 등지에서 무대를 가졌으나 김수근 서거 후 내가 깼다(破). 어느새 우리는 서로 의존하고 있었고, 그런 무대는 공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동그라미’ 이후는 솔로 연구를 계속하며 해외 순회 공연을 가졌다. 그러던 중 이판근이 “심상찮은 사람 있다”며 소개해 준 사람이 타악 주자 박재천과 부인인 피아니스트 미연이다. 그들 부부와 낸 음반 ‘이사야’까지 포함한다면 100여 차례 공동 작업했을 만큼 서로를 음악적으로 잘 안다.

그러나 우리의 소통 방식은 남다르다. 사실 그들과의 대화는 5분 넘는 법이 없다. 즉흥으로 부딪치는 것, 연주하는 것이 대화이자 공부다.

재천은 타악 주자이지만 보통 드럼 세트가 아니다. 자기가 구상해낸 타악 세트로 멀티 사운드를 구사한다. 말하자면 타악기로 완성시킨 소우주다.

부인인 피아니스트 미연은 원래 대중음악 쪽으로 인기인을 꿈꾸다 나를 만나 세계관을 바꿨다. 남편인 재천도 부인이 음악의 길을 걷게 해준 내게 감사한다. 자식이 어느 정도 크자 미연까지 무대에 세우더니 일본에 보내 사토 마사히코에게 사숙까지 시켰다.

나는 억지로 만들 생각은 없다. 저절로, 운명적으로 다시 하게 된다. 인연에 연연하지 말라. 세상일이 억지로는 안 된다. 깨달음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과거의 깨달음이 얕았다는 것이 나중에 보이게 되면 감사한 것이다. 결국 삶은 자기 반성, 깨달음의 연속이니. (간단없이 소음이 밀려왔고, 그럴수록 더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던 그는 아까 말한 음반을 가져온다며 집으로 갔다)

Subscribe

Jazzaje의 정원에서 최신 글과 업데이트를 받아보세요.